이승기(44) 생산부장은 확대경으로 막 생산된 종이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미인은 얼굴에 잡티가 없고 광택이 흐르죠? 화장도 피부에 잘 스며들고요. 종이도 똑같습니다. 좋은 종이일수록 흠집이 없고 윤기가 흐르면서 인쇄가 잘됩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한 해를 정리하는 인사를 주고받는 때다. 최근 몇 년 동안 e메일 연하장과 휴대전화 이모티콘을 활용한 신년 메시지 등이 인기였지만 요즘에는 종이로 만든 카드와 연하장 수요가 다시 늘어나는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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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아날로그 성격을 지닌 종이와 손 글씨가 ‘조용한 힘’을 발휘한다. 카드와 연하장에 쓰이는 종이는 고품질 아트지로 특수지에 속한다.
○종이의 생명력과 미학
연말연시 특수(特需)를 맞아 바쁘게 돌아가는 무림제지 대구공장에서는 한지(韓紙) 느낌의 ‘클린 폴라리스’, 펄(pearl)을 넣어 독특한 광택을 갖는 ‘갤럭시지’, 질감이 촉촉한 순백색 ‘밀키지’ 등 다양한 아트지를 생산하고 있다.
팬시업체들은 이 종이를 사 달력, 연하장, 포장봉투, 카탈로그, 청첩장 등을 만든다.
공정에 들어가기 전 침엽수 펄프(목재에서 추출된 셀룰로오스 집합체)를 손으로 찢어보니 마치 아기 솜털처럼 보드랍고 포근했다. 펄프는 물과 혼합된 뒤 약품처리 과정을 거쳐 40여 분 만에 커다란 롤 형태의 종이로 감겨 나왔다.
종이 속 숨구멍은 수분에 의해 확대 축소를 거듭하기 때문에 종종 ‘숨쉬는 생명체’로 비유된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의 ‘종이 사랑’도 각별하다.
20년째 이곳에서 일하는 권오종(42) 과장은 “종이만 보면 찢어보거나 불빛에 비쳐 종이 조직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며 “내가 만든 종이에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을 전할 생각을 하면 뿌듯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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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지는 고부가가치 산업
국내 특수지 생산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매출액 4000억 원 수준. 한솔 무림 삼화 국일 신호 등의 제지업체가 특수지를 생산하고 있다.
특수지는 산업 정보 생활 팬시용 등 범위가 넓다. 아트지를 비롯해 투표용지 지도용지 고속도로통행권지 상품권지 아이스캔디지 쇼핑백지 등이 있다.
보통 종이가 t당 100만 원 정도인 데 반해 특수지는 t당 500만 원까지 이른다.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종이 소비도 함께 늘어난다. 한국은 세계에서 20위권 안팎의 종이 소비국이다.
오페라 관람권, 컴퓨터 복사지, 쇼핑백, 어린이가 먹어도 안전한 책 등 갈수록 늘어나는 종이 수요는 과거 ‘페이퍼리스(paperless) 사회’ 전망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 부장은 “요즘에는 은은하게 광택이 나면서도 종이 고유의 질감이 느껴지는 제품이 인기”라며 “디자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트지 시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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