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 해도 ‘안정’이 최고=대기업 연구소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정모(45) 씨는 올해 초 연봉과 사회적 명성이 떨어지는 국책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정 씨의 이직은 동료들 사이에서 뉴스가 되지 못했다.
정 씨는 “정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옮겼다”며 “이전 연구소는 평가를 통해 매년 전체 연구원의 10∼20%를 솎아 내니 지금 잘나가도 언젠가는 정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터넷 취업 포털 사이트 잡링크가 최근 직장인 1234명을 상대로 ‘회사에서의 장래 희망’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승진에 관계없이 가능한 한 오래 근무하고 싶다’는 응답이 전체의 25.8%나 됐다.
경영학 석사인 이필성(가명·32) 씨는 금융회사를 5년 정도 다니다 지난해 초 한 공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이 씨는 이전 기업에서 자신이 ‘부속품화’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새벽 별 보고 출근해 달 보고 퇴근하는데도 개인의 희생만 강요할 뿐 정년 보장도 안 되고 보상도 적었다.”
이 씨는 “수명이 길어져 40대에 회사를 떠나도 3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 나이면 재취업도 쉽지 않다”며 “고민 끝에 공기업에서 새 출발 하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서울 소재 유명 사립대 교직원인 정모(39) 씨도 비슷한 이유로 전직한 경우.
정 씨는 “우리 대학 전체 교직원의 80%가량이 언론사, 외국계 회사 등 번듯한 직장에 다니다 시험 치고 온 사람들”이라며 “다른 학교 교직원 사회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전했다.
이 같은 현상은 자녀의 직업 선택이나 결혼시장에까지 반영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서울 소재 제조업체 근로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51.2%가 자녀의 희망 직업으로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을 꼽았고 뒤이어 공무원(23.8%) 교직원(10.4%) 개인사업가(7.6%) 순이었다.
또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최근 20세 이상 미혼 여성 1342명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을 조사한 결과 복수 응답을 통해 전체의 42.4%가 공무원·공기업 직원, 22.4%가 교사를 꼽았다.
▽복지부동(伏地不動) 현상 확산=가늘고 길게 살려는 풍토가 확산되면서 직장인 사이에 복지부동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국내 5위 안에 드는 대기업 영업부 강모(42) 팀장은 지난해 10월 팀의 연간 매출 목표를 일찌감치 달성했다. 강 팀장은 연말까지 매출 목표의 30% 이상을 초과 달성할 수 있었으나 10월 말부터 팀 전체를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로 운영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목표를 30%나 초과 달성한다면 올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목표치를 높여야 했거나 지난해 매출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았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괜히 튀어 봤자 결국 손해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몸조심하려는 분위기가 많다”고 털어 놨다.
경영계 일각에서는 최근 기업의 투자 부진 이유에 대해 ‘위험(리스크)’을 떠안지 않으려는 실무진의 복지부동 풍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회사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직장인들의 자격증 취득 열풍도 갈수록 거세다.
증권사 차장인 김모(38) 씨는 접대가 많은 속칭 ‘증권 브로커’다. 하지만 그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야간에 다니고 있는 교육대학원 과제 때문이다. 대학원을 마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김 씨의 대학 전공은 영어영문학. 대학생 때만 해도 일부 친구가 교육학 과목을 이수한 뒤 교사 자격증을 따는 것을 보고 “쩨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장생활 13년 만에 차장이 된 지난해 김 씨는 교육대학원 야간 과정에 진학했다.
“회사가 그동안 제대로 구조조정을 못해 차·부장급이 비대해져 있어요. 매년 초면 몇 백 명을 해고한다는 소문이 흉흉해 교사 자격증을 따두기로 했습니다.”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인 김모(40) 차장은 “PB가 은행의 꽃으로 떠오른 것은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라며 “일단 능력을 갖추면 회사가 마음에 안 들 경우 얼마든지 높은 몸값을 받고 다른 회사로 옮길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입시학원에는 아예 다니던 직장을 접고 의대나 한의대 진학으로 ‘평생직업 자격증’을 따려는 샐러리맨도 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金廷翰) 연구위원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한국 사회는 노후를 보장해 줄 만한 사회적 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직장인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또 “고령화 추세가 가속화하면서 사회 전체의 비용 부담도 늘어나는 만큼 임금피크제 확산 등 직장인의 수명을 늘리는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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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탈락하면 옷 벗고 성과 나빠도 퇴출…임원이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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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고용 불안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속칭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이 있다.
사오정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새로 임원이 되는 연령층이 갈수록 젊어지는 추세에서도 드러난다.
임원이 못되면 옷을 벗어야 하고, 임원이 돼도 성과가 나쁘면 조기 퇴출당하는 게 직장인들의 현실이기 때문.
주요 대기업의 올해 신규임원 인사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초 삼성그룹 정기인사에서 상무보로 승진한 236명의 평균 연령은 44.7세, 평균 근속 연수는 19년에 불과했다.
또 삼성그룹 전체 임원 1300여 명의 평균 연령은 47.5세로 전년(48.3세)에 비해 0.8세 낮아졌으며 40대 임원 비율 역시 인사 전 60%(769명)에서 68%(963명)로 8%포인트 높아졌다.
SK그룹의 신규 임원은 평균 연령 45.5세, 근속 연수 19년이었다. 임원 승진 경쟁률은 무려 71 대 1이었다.
전체 임원의 평균 연령도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 증권거래소는 지난해 말 상장회사 전체 임원의 평균 연령은 52.7세로 2001년의 54.7세에 비해 5년 사이에 2세나 젊어졌다고 밝혔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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