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잘나가는 제2 금융권 금융회사에서 여신업무를 담당하는 김모(41) 차장은 1997년 외환위기 전만 해도 무리를 해서라도 대출실적을 늘리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요즘은 정반대다. 김 차장은 “몇몇 선배 동료가 나중에 사고가 터져 책임지고 물러나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기본만 하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초 인사철을 맞아 직장인들 사이에서 승진보다는 안전운행 위주의 장수(長壽) 전략을 택하는 ‘가늘고 길게 살아남기’ 현상이 해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전력공사가 지난해 상반기 신입사원 지원 현황을 자체 분석한 결과 329명 모집에 삼성 출신 316명, LG 300여 명, 현대 100여 명, SK 40여 명 등 이른바 ‘잘나가는’ 직장인이 800명 가까이 원서를 냈다.
박모(34) 씨도 올해 5월 한국전력 공채에서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에서 대리까지 지냈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에 도전한 것. 박 씨는 “한전에 합격했다고 사표를 냈을 때 팀장만 이해 못한다는 표정이었고 동료들은 오히려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홍보담당 임원은 “연말 임원 인사를 보니 임원이 된 지 2, 3년 만에 퇴출된 사람이 부지기수고 1년 만에 옷을 벗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승진보다는 오래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찾으려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의대나 교육대학원 등에는 자격증을 갖춘 ‘인생 2라운드’에 도전하는 신입생도 꾸준히 늘고 있다.
경희대 한의대 ‘나이든 사람들의 모임(나사모)’ 전 회장인 김모(45·본과 4년) 씨는 “잘나가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살았지만 조기 퇴출되는 선배 동료들을 보고 회사생활은 내 밥그릇을 남의 손에 맡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면서 “뒤늦게 공부하느라 시간과 돈을 많이 까먹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업 관계자들은 직장인들의 ‘길고 가늘게’ 현상 이면에 공직사회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복지부동(伏地不動)’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 저하 등의 부작용도 적지 않게 깔려 있다고 우려한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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