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 홍사광!”
1972년 2월의 어느 날 새벽. 강원 화천군의 모 전방 부대 막사에서 잠을 자던 이병 홍사광은 병장의 화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관등성명을 댔다.
막사 뒤로 불려간 홍사광은 병장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다.
“신참 주제에 사탕을 먹어? 담배로 받아서 고참에게 상납해야 할 것 아냐!”
당시엔 사병에게 매일 ‘화랑’ 담배 한 갑, 비흡연자에게는 사탕 한 봉지씩이 지급됐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지 않던 홍사광은 다음 날 담배를 타 병장에게 상납했다.
“야, 일어나.”
이번엔 상병이었다. 홍사광은 또 얻어맞았다.
“병장과 상병 중에 누구랑 군대생활 오래 할 것 같아?”
그때부터 홍사광은 담배를 피웠다. 누구에게 상납할 것인지 고민하고 눈치 보느니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처음엔 기침이 났지만 피울수록 구수했다.
1947년생 홍사광 씨. 그는 군대에서 고참에게 맞아 가면서 담배를 배웠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1975년 여행사에 입사한다. 홍 씨는 그때부터 ‘담배 품에 안기고 담배에서 낭만을 찾는’ 골초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승리의 브이(V)자를 그린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넣고 한 모금 빠는 멋이란! 대리시절, 홍 씨는 임직원 500명 규모의 한 기업을 거래처로 끌어왔다. 이들의 해외출장 항공권만으로도 매출은 엄청나게 오를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부장이 그 계약을 자신의 실적으로 슬쩍 올렸다.
그때 흥분한 폐 속으로 스며든 니코틴은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켜 주며 “참아, 딴 데 가도 저런 놈은 있어!”라며 홍 씨를 위로했다.
▽‘깨지는 결심’IMF에 9·11테러 충격에… 놓았던 담배 다시 입으로▽
최고경영자까지 지낸 그는 1996년 회사를 나와 여행사를 차렸다.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를 여직원들은 불편해 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야만인…” “나가서 피워라…” 등의 면박이 이어졌다. 그는 담배를 끊었다. 50줄에 접어든 나이와 건강도 걱정됐다.
금연 두 달째 되던 1997년 11월, TV에 경제부총리가 나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했다.
중소여행사들의 줄도산이 시작됐다. 창업 1년여 만에 직격탄을 맞은 그는 다시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용돈 줄 여유가 없어 대학생인 두 아들은 군대에 보냈다.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서울 집을 팔고 경기 하남시에서 살 집을 알아보던 중 아내가 말했다.
“내가 노점상이라도 할 테니 당신은 걱정 말고 순리대로 일처리해요.”
그날 홍 씨는 담배보다 가족이 더 큰 위안이 된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어렵게 1년을 버티자 항공권 수요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살았구나’ 했다. 그는 담배를 또 끊었다.
하지만 담배와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터졌다. 2003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2004년에는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발생하면서 그는 담배를 다시 물었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를 찾아갔다. “야만인, 나가 피워라”던 친구였는데 그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오늘이 금연 10년째 되는 날이야. 더는 못 참겠어. 사실은 그때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어서 일부러 금연 얘기를 꺼내 너를 섭섭하게 한 거야.”
‘10년 끊은 놈도 피우는데, 내가 다시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그날 이후 홍 씨는 담배를 마음껏 피우며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했다. 회사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가족을 위해’“담배랑 헤어지자” 결심하니 잃었던 행복이 다가왔다▽
2004년 어느 날 첫째아이를 임신한 며느리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홍 씨는 무심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며느리가 움찔했다. 담배연기를 맡은 손자가 며느리 뱃속에서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게 보이는 듯했다. 소름이 돋았다. 역겨웠다. 9·11테러, 사스, AI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새삼 ‘가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후 홍 씨는 7, 8차례 꿈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자신의 입에서 빠져나온 담배연기는 허공에서 기형아의 모습을 그렸다. 이불은 식은땀으로 젖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홍 씨는 여행사인 초록항공의 대표다. 현재 2년째 담배를 끊고 있는 그는 “가족을 잊고 담배 술과 살아온 세월이 후회된다”고 털어놨다.
홍 씨는 “손녀 서영(2)이 아니었으면 가족을 모른 채 계속 담배와 살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담배를 끊는 것은 잃어버린 인격을 되찾는 일”이라고도 했다.
가족도 “잃어버렸던 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온 것 같아 너무 기쁘다”고 한다.
그는 새해 금연을 결심하는 흡연자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주위에도 가족이 있지 않나요? 이제 담배랑 그만 헤어지고 가족과 지내세요.”
홍 씨는 “일 때문에 금주는 힘들지만 올해부터 술도 조금씩 줄여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금연을 도와 주는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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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광 씨처럼 어떤 계기가 있어서 금연에 나서더라도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다시 담배에 손이 가기 쉽다. GS이스토어 옥션 등 온라인 쇼핑몰들이 소개하는 금연 보조 상품을 소개한다.》
○ 노스모큐 금연초 골드(3만 원대)
담배와 맛과 향이 비슷하지만 니코틴 성분이 없는 금연초다. 담배 생각이 날 때 사용하면 흡연 욕구를 어느 정도 억제시켜 준다는 게 회사 측 설명.
○ 금연 시계(3만 원)
금연 경고 표시 바탕에 분침과 시침이 담배 모양으로 제작된 시계. 수시로 금연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 킥더 해빗(2만9000원)
1, 2, 3단계별 필터 14개씩으로 구성된 상품. 체내에 흡입되는 니코틴의 양을 서서히 줄여 나가는 원리로 흡연 욕구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 필터 한 개로 15∼20개비의 담배를 피울 수 있다.
○ 금연 음반 CD(1만3000원)
‘금연을 위한 심리훈련’과 ‘특수 음향치료’ 등으로 구성된 음반. 이어폰이나 헤드셋을 이용해 귀에 가까이 대고 들으면 효과가 높다고 한다.
○ 미스터 브라운(Mr. Brown) 기침하는 재떨이(1만5000원)
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면 네 귀퉁이에 달린 센서가 작동해 섬뜩한 기침 소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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