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형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전문가 분석

  • 입력 2006년 1월 13일 03시 02분


해외 사례는…정부가 추진하는 ‘참여형 도시 만들기’의 모델이 된 해외 도시들. 정부는 이들 도시에 대한 사례 연구를 올해 8월 말까지 끝내 이 계획에 반영할 방침이다. 위부터 독일의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 주민참여형 마을 만들기로 유명한 일본의 세타가야, 스페인의 건축문화 중심지 빌바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해외 사례는…
정부가 추진하는 ‘참여형 도시 만들기’의 모델이 된 해외 도시들. 정부는 이들 도시에 대한 사례 연구를 올해 8월 말까지 끝내 이 계획에 반영할 방침이다. 위부터 독일의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 주민참여형 마을 만들기로 유명한 일본의 세타가야, 스페인의 건축문화 중심지 빌바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취지는 좋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으로 서두르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가 이르면 이달 말부터 본격적인 공론화에 나서겠다고 밝힌 ‘참여형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획일적인 도시 개발 개념에서 벗어나 주민 참여형 도시 개발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주민 참여를 실질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제도 및 문화적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대통령 지시에 따른 중앙정부의 활동으로는 일본 세타가야(世田谷) 구의 ‘마치즈쿠리’(마을 만들기) 운동과 같은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관이 나서면 주민이 떠난다

강병기(康炳基·도시공학 박사) 공간정보계획시스템 대표는 1998년 당시 고건(高建) 서울시장의 선거 공약으로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작업을 도와 준 것을 가끔 후회한다.

1997년부터 시민단체와 함께 이 운동을 전개한 강 대표는 고 시장이 당선되면 시에서 재정 지원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고, 실제로 서울시내 23개 구에 관련 예산이 지원됐다. 하지만 이 운동은 지금 흐지부지되고 있다.

그는 “정부 지원만 받으면 주민 참여는 따라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왜 이 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부족했다”며 “중앙정부 차원의 획일적인 개발 매뉴얼을 지방에 하달하는 식으로 하면 이전의 도시계획과 달라질 게 없다”고 지적했다.

광주에서 시민단체와 함께 ‘푸른길 공원’ 조성 작업을 하고 있는 전남대 송인성(宋仁城·지역개발학) 교수는 “지방자치단체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통에 주민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지자체의 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지역사회 공동체 회복이라는 이 운동의 취지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처음 시도되는 프로젝트인 만큼 시행 초기에는 정부가 인내심을 갖고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영남대 신동진(申東珍·도시공학) 교수는 “계획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한 뒤에는 정부가 의지를 갖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조정해야 한다”고 봤다.

많은 전문가는 불필요한 논란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올해 5월 지방선거 전에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는 반대했다.

한국개발연구원 김정호(金政鎬·정책분석학) 교수는 “정치 논리로 이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계획 발표 시기를 지방선거 뒤로 늦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참여형’ 문화와 제도가 있는가

전문가들은 한국의 주민참여 문화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진국 모델을 무작정 벤치마킹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봤다. 주민 의식이 성숙해질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과 여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계획 마련에 참여했던 서울시립대 정창무(鄭昌武·도시계획학) 교수는 “사람들마다 먹고살기 바쁜 한국에서는 자발적 참여 문화를 충분히 기대하기 어렵다”며 “정부가 모델로 삼는 미국 유럽 등은 근무 시간도 적고 사회적 봉사가 일상화된 곳”이라고 말했다.

주민이 참여하는 도시를 만들려면 국민의 소득 및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게 선행 과제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마치즈쿠리 운동을 지켜봤던 강 대표는 “오랜 자치 문화에 기반한 마치즈쿠리 운동의 성과물만 보고 이를 국내에 도입하겠다는 발상은 개발독재 시대의 도시계획과 다를 게 없다”며 “정부가 ‘이제부터 참여하자’고 해서 주민들이 바로 나서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신 교수는 “현 단계에서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사회적 자산(social capital)이 부족하다”고도 했다.

점차 다핵화되는 사회 구조를 걸림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송 교수는 “호남지역에서는 5년에 한 번꼴로 집을 옮기는데 계속 살 집이 아니라면 누가 자발적으로 자기 주변을 가꾸려고 노력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이 계획 마련에 참여했던 협성대 이재준(李在浚·도시건축공학) 교수는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려면 일본 세타가야, 브라질 쿠리티바 등 각국의 모범사례 중 장점만을 뽑아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자체 간 갈등의 기폭제 될 수도

전문가들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더라도 ‘지자체 간 예산 타내기 경쟁’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시행 초기부터 지원 대상에 대해 옥석을 가리는 기준이 필수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정부는 도시평가 기준을 마련해 재정 지원의 근거로 삼겠다지만 시행 초기에는 목소리가 크거나 지역에서 세를 갖고 있는 소수 주민이 ‘참여’를 명분으로 재정 지원을 독점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했다.

김 교수는 “중앙정부는 지자체가 참여형 도시 만들기에 경쟁적으로 나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완비한 뒤 사업을 시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 시절 ‘지방개발법(Community Development Act)’을 만들어 각종 성과에 따라 지원 대상 지자체를 선별하는 기준을 확립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인구 50만 명 이상의 도시 중 재정자립도가 높고 주민 참여를 위한 기반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진 곳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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