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환율 개입 ‘안먹히는 입’…쐈다하면 ‘空砲’

  • 입력 2006년 1월 16일 03시 05분


은행 외환딜러 B 씨는 지난해 3월 10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이날 외환시장은 시작과 동시에 원-달러 환율 1000원이 무너졌다. 그는 ‘설마 더 내려가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달러화를 팔지 않았다.

이틀 전 재정경제부 고위 당국자가 “최근 환율 동향을 볼 때 정부가 외환시장 안정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시장 개입을 강하게 시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율은 996원까지 내려갔고 그는 손절매(損切賣·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일정 손해를 감수하며 파는 것) 규정에 따라 달러화를 팔아야 했다.

1시간여 뒤 993원까지 내려가자 그는 “이 정도면 정부가 들어오겠지”라고 판단해 달러화를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환율은 989원까지 더 내려갔고 외환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이날 이후 그는 외환 당국자의 말은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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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개입은 신뢰가 생명인데…

외환 당국은 구두 개입과 직접 매매를 통해 시장을 조절한다.

구두 개입은 과도한 매도 또는 매수 현상이 나타나 환율이 출렁거릴 때 말로써 시장에 경고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당국은 비정상적인 환율 하락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며 엄포를 놓는 것.

그래도 딜러들이 달러화를 계속 싸게 팔면 당국이 직접 달러화를 사들여 결국 판 세력이 손해를 보게 만드는 방식이다.

정부는 외환 수요와 공급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고 막강한 자금력을 지닌 ‘큰손’이기 때문에 당국자의 발언은 투자의 기준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양치기 소년’이 된 외환 당국

한국 외환 당국이 신뢰를 잃은 이유는 경고만 하고 정작 ‘실탄’을 쏘지 않기 때문이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우화와 비슷하다.

지난해 12월 초 원-엔 환율이 100엔당 880원까지 떨어지자 외환 당국은 여러 번 개입을 시사했다.

외환딜러 C 씨는 당국이 원-엔 환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에 이 말을 믿고 860원에서 엔을 사들였다. 이후 당국의 일시적 개입으로 100엔당 880원까지 올랐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날 환율은 오히려 850원까지 떨어졌고 C 씨는 큰 손해를 봤다.

신뢰를 잃는 또 다른 이유는 구두 개입을 남발한다는 점이다.

2004년 10월 달러당 1140∼1150원을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은 11월 말 1040원까지 떨어졌다. 한 달여 만에 100원이 떨어진 것. 당시 외환 당국은 “급격한 환율 하락에 적극 대응하겠다”며 여러 차례 시장 개입 의지를 보였지만 달러 매입 규모는 크지 않았다.

C 씨는 “요즘에는 당국이 점심시간을 틈타 환율 호가만 올려놓는 얌체 같은 개입이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배워라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그린스펀이 말하면 시장은 듣는다(When Greenspan talks, the markets listen)”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앙은행 총재에 해당하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달 말 임기가 끝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따라 움직인 것은 시장 참가자들이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존 스노 미 재무부 장관 역시 국제 외환시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미국 당국자의 발언은 철저한 계산을 거쳐 매우 신중하게 나온다”며 “한국은 당국자의 말을 믿고 방향을 잡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실탄이 떨어지고 있다

13일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13.80원 오른 달러당 987.80원으로 마감했다.

이날 한덕수(韓悳洙)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시장이 안정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력한 개입 메시지를 던졌다. 당국은 한 부총리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평소(약 5억 달러)보다 훨씬 많은 10억∼15억 달러(추정)를 사들였다. 결국 이날 환율을 끌어올린 것은 부총리의 발언이 아니라 당국의 대규모 달러화 매입이었다.

문제는 ‘실탄’. 외환딜러들은 당국이 이달 들어 이미 20억 달러(약 2조 원) 이상을 외환시장에서 사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올해 외환시장의 안정 목적으로 배정한 국고채 발행물량은 총 10조 원. 또 예비 물량으로 1조 원을 추가로 배정했다.

하지만 보름 만에 2조 원 이상을 썼기 때문에 ‘11조 원’ 정도로 연말까지 버티기에는 실탄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김두영 기자 nirvana1@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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