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나오는 디자인 섹션 시리즈를 통해 한국 기업들의 디자인 전략을 비롯해 ‘컨버전스’ ‘에코(eco) 디자인’
‘휴먼 터치’ ‘인비지블(invisible) 서비스’ 등 디자인 트렌드를 진단한다. 영국 미국 등 디자인 강국의 현장도 들여다본다.》
“디자인으로 소비자와 통(通)한다.”
삼성 LG 현대자동차가 내세우는 21세기 키워드는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기업과 소비자를 소통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다.
그래서 디자인은 신제품 기획과 개발, 생산 공정을 지배하고 있다. 디자인이 기술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기술이나 품질의 상향 평준화로 인해, 경쟁력은 소비자의 개성을 표현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대변하는 디자인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박폰’으로 불리는 LG전자의 ‘초콜릿폰’, 국내외에서 1000만 대가 넘게 나간 삼성의 휴대전화 ‘T-100’의 신화는 ‘나를 표현하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을 간파한 디자인 혁신의 과정을 통해 태어났다.
두 제품은 디자인 콘셉트에 기술을 맞췄다. 디자인이 먼저이고, 그에 부합하는 기술은 나중에 개발했다. 글로벌 기업에서 디자인은 제품의 외관을 다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디자인은 소비자의 트렌드와 개성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를 제품으로 구현해 시장에 적용하는 마케팅까지, 즉 기업 경영의 ‘A에서 Z까지’ 관류하는 전략적 개념이다.
지난해 말 비즈니스위크지는 ‘디자인이 국가 경쟁력’이라며 “만든(made in) 국가나 기업보다 디자인한(designed in) 국가(기업)의 부가가치가 높은 시대가 왔다”고 진단했다. 디자인이 글로벌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인 삼성 LG 현대 자동차의 디자인 전략을 알아본다.
○ 삼성의 CDO
삼성에는 다른 기업에서 보기 드문 직함이 있다. 디지털미디어총괄 최지성 사장의 공식 직함은 CDO(Chief Design Officer). ‘최고 디자인 책임자’라는 뜻이다. 기업에서 최고 재무 책임자(CFO)를 두는 경우는 많지만 디자인 부문 책임을 맡기는 것은 희귀 사례다. 그만큼 최고경영자(CEO) 직속 기관인 디자인경영센터장을 맡고 있는 최 사장에게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여한 것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1996년 신년사에서 ‘디자인 혁명’을 선언한 뒤 디자인 부문을 집중 육성해 왔다. 삼성의 디자인 인력은 해외를 포함해 500∼550명. 1990년대 불과 100명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 비하면 상전벽해다.
특히 이 회장은 지난해 4월 ‘디자인 혁명 선언 10주년’을 계기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계열사 사장단과 ‘디자인 전략회의’를 가졌다. “디자인과 같은 무형의 창조적 자산이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될 것”이라는 10년 전의 선언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자리였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독창적 디자인, 유저 인터페이스(UI·사용자 중심의 환경) 구축, 디자인 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을 통해 ‘월드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역량있는 디자이너 확보와 이들에 대한 지원을 전사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삼성은 ‘디자인 뱅크 시스템’이라는 디자인 재활용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번뜩이는 상상력에서 나오는 디자인을 나중에 제품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다. 실제로 디자인이 기술이나 유행을 성큼 앞서 간 사례도 있다. 세계 최초의 ‘듀얼 폴더폰’이나 ‘플립 업 폰’도 디자인 뱅크에 저장돼 있던 아이디어를 부활시킨 제품이었다.
삼성은 또 디자이너들이 희망에 따라 자유롭게 담당 분야를 이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회의도 부장의 책상에 걸터앉아서, 사무실 밖 스타벅스에서 자유롭게 수시로 열린다.
이런 자유로운 발상은 공정 기간을 단축시켜 최신 아이디어를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기획에서 출시까지 통상 1년여 가까이 걸리던 기간이 최근에는 2∼3개월에서 평균 6개월을 넘기지 않고 있다.
○ LG의 미래 선도 디자인 경영
LG전자는 독립된 디자인경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기업이 사업별 제품별 디자인 부서를 생산이나 마케팅 부문 산하에 두고 운영해 오고 있지만 LG전자는 디자인 부문을 완전 분리해 디자인경영센터에 집합시켰다. 디자인 부문이 관리 업무와 함께 있으면 소비자의 변화에 다가갈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역량이 뒤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LG의 디자인 인력도 삼성과 마찬가지로 500∼550명에 이른다.
LG전자는 신제품의 디자인 개발주기를 앞당기는 ‘스피드 디자인 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전자 제품의 디자인 유행 주기가 급격히 짧아지고 있어 이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제품 품평 시스템을 개선했다.
LG전자는 ‘가장 잘 팔리는’ ‘가장 고급스러운’ ‘가장 최초의’를 1등 디자인의 3대 핵심가치로 꼽고, 3대 전략 과제로 차별화된 ‘혁신적 디자인’, 제품 품질뿐 아니라 소비자의 편의성과 감성까지 고려한 ‘프리미엄 디자인’, 신개념 제품을 제한하는 ‘미래 선도형 디자인’ 역량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의 심재진 상무는 “소비자의 신뢰와 만족을 뛰어넘는 ‘LG다운 디자인’, 프리미엄 디자인을 선보이는 게 우리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삼성전자 비주얼 디자인그룹 이승호 선임▼
“디자인은 언제나 사람을 향하는 겁니다.”
삼성전자 디자인미디어총괄 비주얼디스플레이 디자인그룹 이승호(33·사진) 선임은 디자인 철학을 간명하게 설명했다.
그는 올해 초 디자인 실무자로는 처음으로 삼성의 최고상인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다. 1997년 이 상이 제정된 이래 최연소, 최하직급 수상 기록도 세웠다.
그가 디자인한 LCD 평면TV는 지난달 31일 업계 최초로 100만대 판매 및 10억 달러 매출을 달성해 최초의 ‘밀리언달러 평판 TV’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그가 가진 수많은 ‘최초’ 타이틀. 그럼에도 그의 디자인 철학은 심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디자인의 요체는 사람이라는 말이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며 디자인센터의 제품 제작 과정을 설명했다.
“디자인실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크게 틀어놓기도 하고 상급자의 책상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누구나 희망하는 본능이죠.”
그가 디자인한 LCD TV ‘밀라노’ ‘로마’는 이러한 그의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밀라노는 TV화면 이외의 요소는 모두 숨겼다. 스피커는 화면 아래에 숨기고 버튼도 본체와 같은 색으로 숨어 있다가 작동할 때만 불이 들어온다.
그는 “좋은 디자인은 제품의 본래 기능을 최대한 살리고 인위적 요소들은 최소화 하는 것”이라며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하되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임무”라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박상민 선임 연구원▼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박상민(34·사진) 선임연구원은 ‘초콜릿폰’의 아버지쯤 된다. 전화기 본체를 그가 디자인했다. 그는 요즘 하루에도 수십 번씩 초콜릿폰을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한다. 후속 모델 디자인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초콜릿폰은 기존 관행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디자인 공정을 개척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던 대로 하는 건 이미 답이 있는 일이죠. 그런데 초콜릿폰 제작 과정은 처음 시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새로 개척하는 길이 순탄할 리 없다.
‘고급스러운 블랙 감’을 살리기 위해 수도 없이 부품 공장을 찾아다녔다. 가끔 ‘디자이너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거 정말 만들 수 있겠어?” 하는 회의에 찬 목소리도 들려왔다. 형태가 단순하기 때문에 고급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만의 ‘느낌’이 가미되어야 했다. 막상 모형으로 제작한 샘플이 ‘싸구려 리모컨’처럼 보였을 때는 좌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는 초콜릿폰 개발에 앞서 시장 조사를 하면서 소비자들의 눈이 높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휴대전화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생활과 패션의 일부였던 것이다.
“잘 때도 휴대전화기를 곁에 두고 아침에 깰 때도 들고 일어나잖아요. 휴대전화는 그만큼 소비자의 생활과 밀착된 제품입니다. 디자이너가 열정을 가지고 애정을 쏟아 부었을 때만이 시장에서 통하는 것 같아요.”
지난달 24일이 제품을 개발한 지 1년 된 날이라는 그는, 회사에서 먹고 자는 날이 하도 많아 디자이너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노숙자는 나의 친구”라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며 웃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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