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반세기 전만해도 일본은 ‘경제적 원숭이’라 불리며 세계 시장에서 외면당해 왔다. 산업디자인 강국인 영국 등 유럽 국가를 비롯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던 미국이 일본이 ‘베끼기’식 제품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고 폄훼했던 것이다.
이들의 우려는 반세기 만에 현실로 다가왔다.
자동차 시장은 본고장 미국은 물론이고 고급 시장을 선도하던 유럽 메이커들도 도요타의 렉서스 등 일본 제품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세계 가정에 있는 제품의 약 20%는 일본이 디자인한 가전이나 가구, 생활용품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이러한 일본 디자인의 급성장 배경에는 디자인 경쟁력을 내다본 혜안, 정부와 민간이 일체가 된 ‘전략’이 있었다.
○ 중앙과 지방정부, 민간단체의 삼위일체
일본 디자인 산업은 3개의 축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중앙정부의 지원과 정책, 또 하나는 이를 기업과 연결시켜 주는 민간 단체의 장려제도, 끝으로 지방자치단체별로 차별화된 자체 디자인 육성 프로그램이다.
특히 중앙정부의 디자인 분야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산업화 초기단계인 1950년대 말 통산산업성에 디자인과를 신설했으며 1970년대에는 디자인을 유망 산업으로 분류해 차세대 산업으로 육성해 왔다.
1957년 통상산업성이 주관해 도입한 ‘굿 디자인상’(G마크)은 디자인 중심의 기업 문화를 이끌어 낸 대표적인 정부 정책 중 하나. 매년 우수 디자인 제품을 시상하는 이 제도는 디자인 산업분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브랜드가 없던 중소 기업들은 G마크를 제품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부의 또 다른 정책인 ‘수출품 디자인법’도 디자인 자생력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법안은 외국 디자인 모방품은 수출하지 못하도록 한 법안이다. 이처럼 ‘당근과 채찍’이 조화를 이룬 정책은 기업간 디자인 경쟁을 부추기고 독창적인 디자인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지자체의 특화된 디자인산업 육성정책도 맥을 잇고 있다. 1951년 정부 산하 공업기술센터를 만들며 그 안에 산업디자인과를 둔 아이치 현이 대표적. 아이치 현은 산업디자인과를 통해 디자인 정보 교류와 디자이너 육성교육, 지방 특산품인 도자기 잡화 섬유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의 디자인 컨설팅도 해 주고 있다.
민간단체인 일본산업디자이너협회(JIDA), 1998년 민간법인화된 일본산업디자인진흥회(JIDPO) 등은 해외 디자인 대회 유치나 정보 교류에 적극적이다. 이들은 1973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1959년부터 격년제로 열리는 ‘세계디자인대회’를 유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외 디자인대회 유치를 통해 외국의 앞선 디자인을 소개함으로써 국내 기업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한편 자국의 디자인 제품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은 2001년 아시아에서는 일본 대만에 이어 세 번째로 이 대회를 유치했다.
○ 누가 봐도 일본제품
‘Will Design Save Japan?(디자인이 일본을 살릴 수 있을까?)’
지난해 말 일본의 디자인전문 월간지 ‘카사 브루투스’는 60여 쪽에 달하는 특집을 실었다. 일본의 제품 디자인 경쟁력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자국 디자인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
이 질문에는 위기감도 배어 있지만 자국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도 동시에 묻어 있다.
일본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겐지 에쿠안 GK디자인 그룹 회장은 일본 디자인의 경쟁력은 “실용적인 단순함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겐지 회장은 1950년대 디자인전문회사를 설립해 현재 국내외 12개의 디자인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 최대의 디자인 그룹 책임자.
그는 “일본에서 디자인한 제품은 누가 봐도 일본제품임을 안다. 그것은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일수록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디자인과 편리성의 특징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40, 50년대 전쟁을 거치며 일본인들의 뇌리에 남겨진 ‘실용적 합리주의’가 디자인에 그대로 반영된 덕분”이라며 “다변화되고 복잡해지는 정보기술사회에서 역설적으로 간단명료한 것을 찾는 소비자 심리가 일본 디자인 콘셉트와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박단소’를 모토로 내세운 일본 기업들의 디자인이 각광받고 있다.
10여 년째 계속됐던 장기 불황 속에서도 ‘잘 팔리는’ 제품들은 모두 심플 디자인이 특징이다. 생활용품 브랜드 ‘무지(無印)’는 군더더기없는 심플하고 기능적인 디자인과 모노톤의 색조로 일본 시장을 장악하더니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성공했다. 의류브랜드 ‘유니크로’도 단순한 패턴과 단색조의 디자인으로 의류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들 모두 중저가 브랜드지만 단순한 디자인 개발을 위해 적지 않은 투자를 하고 있다. 무지의 경우 일본의 대표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다나카 이코를 비롯해 인테리어 제품 광고 분야의 유명 디자이너를 영입해 제품개발을 하고 있다. 유니크로는 수년 전 회사 실적이 떨어졌을 때 오히려 디자인실을 전면 확대하기도 했다.
일본 디자이너들은 “1950년대 말 마쓰시타전기산업의 창업자(마쓰시타 고노스케)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공항에서 밝힌 귀국 소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흥분된다”고 말한다. 그가 남긴 귀국 소감은 “이제부터 디자인 경쟁 시대다”였다. 한국은 수십년 뒤에 그 말이 나왔다.
도쿄=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