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형펀드 2개가 국내기업 싹쓸이할 수도

  • 입력 2006년 3월 27일 03시 05분


《“에너지산업은 국가 기반산업이다.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기간산업을 외국기업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경제 애국주의’다.” 지난달 도미니크 드빌팽 프랑스 총리는 민간 에너지기업 쉬에즈가 이탈리아 기업 에넬에 인수합병(M&A)될 위험에 놓이자 아예 회사를 국영 가즈 드 프랑스(GdF)에 합병시켰다. ‘자본주의에 대한 역행’, ‘지나친 자국 기업 보호로 유럽 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유럽연합(EU) 국가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경제 애국주의를 고수했다. 이런 노골적인 보호 덕분에 쉬에즈는 ‘프랑스 국적’으로 남았다. 글로벌경제 체제에서 경제 애국주의가 옳은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그러나 미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들도 에너지기업 같은 기간산업에 대해서는 경제 애국주의를 고수한다. 미국 대형 펀드 2개만 나서면 국내 100대 기업 경영권을 싹쓸이할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국내 기업을 적대적 M&A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래서 나온다.》

○ 외환위기 이후 무장해제 당해

올해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연합군이 KT&G와 경영권 분쟁을 벌인 것은 세계 M&A 시장에서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사냥꾼이 드디어 한국시장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세계적 기업사냥꾼이 기업 규모도 크지 않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한국 기업에 대한 M&A를 시도하면 최악의 경우에도 본전은 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국내 기업은 주가도 싸고 기업가치가 낮게 평가돼 있다.

1000억 원짜리 부동산을 갖고 있는 기업의 시가총액이 500억 원에도 못 미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런 기업을 500억 원에 사서 부동산만 챙긴 뒤 회사를 청산해도 500억 원이 남는다.

국내 대기업 중에도 이런 기업이 적지 않다. 대한항공의 시가총액은 대한항공이 갖고 있는 자산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효성의 기업 가치는 효성이 보유한 자산의 30% 수준이다.

두 번째는 한국 기업이 뚜렷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급급해 경영권 방어 수단을 거의 없앴다. 무장해제를 당한 채 외국자본을 맞은 셈이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경영권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한국에서는 한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사들일 때에만 금융감독원에 신고하는 ‘주식 대량보유 신고제’(일명 5% 룰)만 실시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독약 조항이나 차등의결권제도 등은 도입돼 있지 않다.

○ 재계 “출자총액제한 폐지를”

경영권 분쟁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재계도 급해졌다. 최근 재계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이경상(李京相) 기업정책팀장은 “미국 500대 기업의 75%가 채택하고 있는 독약 조항이나 유럽 상장기업의 절반 이상이 시행하고 있는 차등의결권제도 등 방어 수단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독약 조항은 상대가 M&A를 시도하면 기존 주주들에게 싼 가격으로 주식을 발행해 방어하는 쪽의 지분을 쉽게 높여 주는 제도. 차등의결권 제도는 같은 주식이라도 기존 경영권의 주식에는 주당 1표 이상의 의결권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경영권을 방어하는 쪽의 지분이 사실상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수희(李壽熙) 기업연구본부장은 “국내 자본이 서로 우호지분이 되기 위해서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 기업이 공격할 때 국내 기업끼리라도 연대해서 방어 전략을 짜야 하는데 한국 기업 간 출자를 제한하면 이런 연대 방어를 할 수 없다는 것.

○ 氣싸움에서 외국자본에 밀려

재계의 요구는 ‘현실적인 대안’을 손에 쥐여 달라는 것에 모아져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실적인 대안도 중요하지만 시급한 것은 ‘한국 정부가 기업을 보호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하루 빨리 보여 주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올해 아이칸 연합군이 국내에 상륙하면서 ‘한국 기업’은 국제적인 기업사냥꾼 사이에서 좋은 먹잇감으로 부상했다. KT&G 경영권 분쟁을 통해 세계 투기자본의 관심이 한국에 더 집중되고 ‘한국은 M&A하기 쉬운 나라’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증권사 관계자는 “M&A는 ‘기싸움’이 중요한데 여기서 한국이 밀리고 있다”며 “사냥꾼은 먹잇감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세를 역전시키려면 정부가 어떤 식으로건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

이 관계자는 “대책의 실효성도 중요하지만 ‘한국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만 보내더라도 투기자본이 지금처럼 쉽게 한국 기업에 접근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중국, 또다른 공룡…M&A 시장 뛰어들땐 파괴력 상상초월

‘지금 자본을 축적하고 있는 중국 기업들이 몇 년 뒤 무엇을 하겠는가.’

삼성증권은 최근 발간한 ‘적대적 M&A 본격화될까’라는 보고서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어 “중국 자본은 몇 년 뒤 본격적으로 세계 M&A 시장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세계 M&A 시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투기 자본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 투기 자본은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산업 자본과는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산업 자본은 현지화를 목표로 단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중장기 계획을 밀고 나간다.

반면 투기 자본은 철저히 단기 수익을 얻는 데만 집중한다. 의사결정 구조가 단순해 속도전에 강하고 일사불란하게 치고 빠지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앞으로 투기 자본들이 판치는 M&A 시장에 중국 자본까지 가세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2004년 12월 중국 기업 레노보가 IBM의 PC사업 부문을 17억5000만 달러(약 1조7000억 원)에 인수한 것이 신호탄이다. 당시만 해도 중국 자본의 세계 진출은 그저 사업 확장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해 중국 3대 국영 석유회사 가운데 하나인 중국해양석유가 미국 석유기업 유노칼의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중국 자본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든 미국 정부는 ‘자본주의 논리에 역행한다’는 국제적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의 유노칼 인수를 저지했다. 초강대국 미국조차 국가 기간산업을 외국 자본에 내주지 않으려 한다는 점과 미국이 두려워할 정도로 중국 자본의 위력이 커졌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세계로 진출하는 중국 자본은 주로 산업 자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정부가 원하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투기 자본과 비슷하다. 의사 결정이 빠르고 목표가 정해지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성격도 비슷하다.

따라서 ‘산업 자본+정부 자본’이라는 복합적 성격을 지닌 중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M&A 시장에 뛰어들면 위력이 서구의 투기 자본 못지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중국 자본이 인접한 한국 기업을 노리기 시작하면 국내 기업들이 제대로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우려가 이래서 나온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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