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취임식을 이틀 앞둔 이달 9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은 인터콘티넨털 호텔은 취임식 축하 사절단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사절단을 태우고 들어서는 차량에는 모두 현대자동차의 ‘SONATA’ 마크가 선명했다. 흰색 쏘나타 160대가 취임식의 공식 의전 차량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1986년부터 10년 넘게 현대자동차의 현지딜러를 맡고 있는 리카르도 레스만 사장은 “칠레에서 한국 차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지난해 현대자동차 판매가 59%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는 도요타를 제치고 시보레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도중에도 산티아고 외곽 아메리고 베스푸치 570번가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총판장의 운동장만 한 출고장에서는 테라칸, 쏘나타, 엑센트가 쉼 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국과 칠레의 FTA가 발효된 지 다음 달 1일로 만 2년이 되면서 파급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자동차, 휴대전화, 캠코더,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등 첨단제품은 칠레 시장에서 메이저로 발돋움하고 있다.
○ 칠레시장 최강자의 꿈이 여문다
비교적 부유층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명문 사립대 가톨릭대. 강의실 복도 곳곳에서 여대생들이 깜찍한 모양의 휴대전화를 들고 수다를 떨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메이드 인 코리아’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제품은 폴더형으로 작으면서도 색상이 화려하다.
경제학과에 다닌다는 한 여대생은 “한국산 휴대전화는 조금 비싸지만 디자인이 좋아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FTA 발효 이후 한국산 전자제품의 성장 곡선은 거의 수직에 가깝다.
칠레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판매는 2003년 20만 대에서 FTA가 발효된 2004년 55만 대, 지난해에는 77만 대로 비약적으로 늘었다.
삼성전자 홍성직 칠레 법인장은 “1월 판매량이 시장점유율 1위인 노키아를 제쳤고 이대로 가면 올해는 연간 판매량으로도 칠레시장에서 최강자가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박남기 LG전자 법인장도 “남미 국가 가운데 칠레 시장에서의 판매 성장세가 가장 가파르다”며 “대부분 첨단기술 제품이어서 국가 이미지까지 함께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산티아고의 시내 어디에서나 ‘SAMSUNG’, ‘LG’, ‘HYUNDAI’, ‘KIA’ 로고가 눈에 띄었다. 특히 부자들이 사는 신시가지에는 한국 기업의 대리점, 애프터서비스 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기현서(奇賢舒) 주칠레 대사는 “이곳에서는 일본보다 한국이 더 알려져 있고 한국인에 대한 인상도 좋다”면서 “FTA 발효 이후 잦아진 교류와 한국 제품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는 29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한국무역협회 주최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열린 ‘한-칠레 FTA 2년 평가와 향후 과제’ 세미나에서도 확인됐다.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대(對)칠레 수출증가율은 2004년 4월 1일 FTA 발효 전 1년 동안 직전 1년 대비 9.6%였으나 발효 후 지난해 3월까지 1년차에 58.2%, 이후 올해 2월까지 2년차에 52.6%로 늘었다.
칠레 수입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의 점유율도 2003년 3.0%에서 2004년 3.1%, 2005년 3.6%로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특히 자동차는 2004년 수입시장 점유율이 16.1%로 일본의 29.5%에 비해 많이 뒤처졌으나 지난해에는 점유율 23.3%로 일본(29.5%)을 바짝 따라붙었다.
한국산 휴대전화의 칠레 시장점유율도 2003년 9.5%에서 2004년 18.2%, 2005년 19.4%로 FTA 발효 이후 2년간 크게 증가했다.
○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
한국 시장에서 칠레산 제품의 점유율도 농산물 위주로 2003년 0.59%에서 2004년 0.86%, 지난해 0.87%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수입관세가 해마다 낮아지다가 2014년에 완전히 없어지는 포도와 돼지 농가는 아직 불안해하기도 한다.
농협중앙회 박철재(朴哲載) 차장은 “충북을 중심으로 소규모 포도주 생산업체들이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값싼 칠레산 와인이 대거 수입되면서 설 땅을 잃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최세균(崔世均)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농산물 전체 수입시장에서 칠레산의 점유율은 2004년 0.4%에서 지난해 0.6%로 높아졌다”면서 “한-칠레 FTA의 농업에 대한 영향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농가 피해가 과장돼 있다는 반박도 나온다.
한국무역협회 정재화(鄭宰和) FTA팀장은 “FTA 발효 후 칠레로부터 수입도 많이 늘었으나 증가액의 85.4%가 동(銅) 등 국내 산업에 필수적인 원자재”라며 “순수 농산물의 수입 증가액은 전체의 1.6%에 불과해 국내 농업에 대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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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김광현 기자 kkh@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칠레정부 시장경제 지지… 개방 더 확대될 것”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점수를 준다면 한국 칠레 모두 만점을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잘해 왔지만 두 나라는 산업구조가 상호 보완관계여서 앞으로 자유무역의 효과가 점점 더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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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트 교수는 “한국으로서는 칠레가 최초의 FTA 협상국이라서 의미가 크겠지만, 칠레도 의미가 남다르다”면서 “이전에 칠레와 FTA를 체결했던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한국은 산업분야의 테크놀로지가 뛰어나 칠레 경제 발전과 소비자 이익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국에서는 휴대전화, 자동차, 첨단 가전제품 등 칠레의 자체 산업이 거의 없는 품목이 들어오기 때문에 FTA 협정 체결에 따른 산업 피해는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칠레는 3월 취임한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과 이전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 모두 사회당 소속이다. 정당 이름만 보면 좌파 성향으로 보이지만 경제 정책은 시장경제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최근 중남미 지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좌파 성향과 관련해 “현 정부에서도 칠레의 자유무역, 대외 개방 정책이 계속될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아체트 교수는 “다른 중남미 국가의 무질서하고 구태의연한 좌파 정부와 칠레 사회당 정부는 전혀 다르다”면서 “앞으로 자유무역과 대외 개방 정책은 더 강조되고 한-칠레 FTA에 따른 교역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산티아고=김광현 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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