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국가는 조세법률주의 원칙에 따라 세금을 걷는다. 이렇게 징수한 세금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 세금을 많이 냈건 적게 냈건 국민 모두에게 공평한 서비스다. 나미코는 세금이란 표현을 썼지만 일제총독부는 김두한에게 징세권을 준 적이 없다. 다만 김두한은 나라 잃은 조선 상인들을 일본 깡패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는 치안서비스를 제공하고 사적(私的)으로 세금을 걷었다고 볼 수도 있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대통령 전두환은 재벌 총수들에게 “기업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자랑한다. 일해재단 성금 모금이 부진하자 본보기로 국제그룹에 대한 은행여신을 중단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국제그룹은 공중분해의 비운을 맞게 된다. 대신에 일해재단 성금은 술술 걷혔다.
기업인이나 상인들이 권력이나 주먹에 세금 외에 보호비를 내는 것은 ‘내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한다’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 권력은 보호비 같은 음성적 자금을 선호한다. 이런 돈은 ‘민주적 통제’가 배제된 징수 방법으로 조달되기 때문에 사용 과정의 투명성이 없다. 권력의 자의적(恣意的) 사용과 사익 추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지금도 공권력이 부패한 나라나 지역에선 보호비 징수가 계속되고 있다.
요즘 우리 기업들은 사회공헌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삼성그룹이 8000억 원을 ‘사회’에 헌납하자 다른 기업들도 성의 표시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은 기업인들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이익을 얻는 만큼 사회공헌금을 내라고 했다. 기업인 A 씨는 “민주화됐다고 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기업을 옥죌 수단을 많이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부금 요구를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쯤으로 여기는 간(肝) 큰 기업인은 없을 것이다.
물론 기업의 사회 공헌은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다만 대가없이 자발적으로 이뤄질 때만 진정성이 있다. 이래야 사회 공헌→기업 이미지 제고→제품 판매 증가의 선(善)순환이 가능해 더 많은 기업이 사회 공헌에 참여하게 된다. 강제성을 띤 사회 공헌은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이윤을 많이 내서 투자와 일자리를 늘린다’는 기업 본연의 존재 이유마저 뒤흔든다. 정부 정책의 결과로 특정 집단이 이익을 많이 본다면 세금을 더 내면 그만이다. 정치권력이 기업에 기부금을 내라 마라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기업 기부금의 사용과 관리가 기부자가 아닌 권력에 넘어가면 기부금은 선거 득표용 준(準)재정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자금 운용 과정에서 횡령과 사취, 비자금 조성 등의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삼성 기부금 8000억 원은 결국 정부가 관리하기로 했다. 소외계층의 장학사업에 쓰기로 했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영화 ‘넘버3’에서도 조폭 두목 강도식은 보호비를 갈취하며 “좋은 일에 쓸게”라고 말했다.
좋은 일에 쓰든, 나쁜 일에 쓰든 권력이 억지로 걷어서 자기 뜻대로 쓰는 기업 기부금은 본질적으로 업소보호비다.
임규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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