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강규형]기업가 정신은 왜 계승 못하나

  • 입력 2006년 4월 17일 03시 03분


걸프 오일의 소유주이자 카네기멜런대를 공동 설립한 멜런가(家)는 미국의 손꼽히는 재벌 가문이다. 이 가문의 상속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래리머 멜런 2세는 1947년 라이프지에 실린 기사를 읽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라는 생소한 이름의 의사가 아프리카에서 벌이고 있는 의료 활동에 관한 보도였다. 슈바이처와 서신 교환을 한 그는 서른일곱의 늦은 나이에 의대에 들어가 의사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는 가족들과 함께 열악한 환경의 아이티에 가서 슈바이처 병원을 세우고 평생 의료 봉사를 했다. 멜런 사후에도 그의 자식과 손자들이 병원을 운영하며 슈바이처와 멜런의 뜻을 잇고 있다 한다.

스탠더드오일의 창립자 존 D 록펠러는 금욕적이고 성실하기는 했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장사꾼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여러 사회사업을 벌였고, 그 아들 존 록펠러 2세는 수많은 선행을 베푼 박애주의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후 록펠러 가문이 사회에 기여한 리스트는 끝이 없을 정도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발전하는 기업에 비해 낙후된 행정과 정치를 질타한 적확한 말이었다. 그런데 삼성을 위시한 한국의 기업들은 이제 세계 일류로 도약하고 있고, 정치와 행정도 일류는 아니지만 전보다는 훨씬 좋아지고 있다. 문제는 기업은 일류가 되고 있는데 기업가 정신은 아직도 3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비자금 펀드 불법 운용을 통한 수천억 원대 부당이득 취득 문제와 현대산업개발의 신주인수권 매매를 통한 회사자금 횡령의혹이 현재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또한 검찰은 최근 재벌 2세 및 3세 7, 8명이 1999년 말 장외시장에서의 주가 조작으로 각각 수십억∼수백억 원의 시세 차익을 챙긴 혐의를 포착했으나 공소시효가 끝난 사안이라 수사를 그만뒀다고 한다. 이러한 재벌 2, 3세들의 행태를 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친(親)기업주의를 표방하는 뉴라이트 진영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뉴라이트의 이념 중 하나는 성장과 고용 창출을 이끄는 기업을 지지하는 친기업-친시장 정책이지 재벌을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더 좋아지는 경향이 있는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재벌들에 대해서는 “2대가 1대보다 못하고, 3대가 2대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필자 눈에는 이들 중 일부가 책임의식 없이 기득권만 누리던 어린 시절 ‘오렌지족’의 모습에 아직 머무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건전하고 확고한 원칙이 없는 상태에서 대기업의 막중한 경영권을 장악하니 이렇게 파행적인 행태가 나오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멜런가나 록펠러 가문 수준의 2, 3세들이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사실 꼭 그럴 필요도 없다. 기업가들은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정직하게 세금 내면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도가 지나치다.

고승철 동아일보 부국장은 얼마 전 칼럼을 통해 한국 재벌 2세들의 상상력 부족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필자는 거기에 더해 소명의식과 원칙의 부재를 거론하고 싶다. 오늘날 한국의 부(富)는 성실한 기업가들의 노력에 의해 창출됐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정치 리더십과 행정 관료들의 올바른 방향 설정, 사회 섹터의 희생에 가까운 협조도 큰 역할을 했다. 비교적 쉽게 부를 승계 받은 2세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부채 의식도 남들보다 커야 한다. 현실은 어떠한가?

위대한 경제사상가인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들은 권력과 타협할 기회가 생기면 바로 타협하고 항복할 기회가 생기면 즉시 항복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한국 재벌들의 과거 행태를 보며 그의 예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과거에는 정치 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 상납하고, 이제는 거기에 더해 친여 비정부기구(NGO)와 같은 사회 권력에 비위 맞추고 돈 대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데, 요번에도 ‘사회기여’니 하면서 거금을 내놓는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인가? 그러나 그 같은 사후약방문식 기부에 대해 감동하거나 고마워할 사람은 없다.

과거의 방식이 통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한국의 대기업가들이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원칙과 비전을 정립해야 한다. 올바른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고 건전한 자유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대가를 치를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그 기업과 가문을 진실로 영속시킬 유일한 방법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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