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법 1조에는 ‘한국산업은행은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중요 산업자금을 공급·관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취급 업무나 영업방식을 보면 이런 설립 목적에 맞는지 의문이다.
○ 본연의 임무 잊은 국책은행
지난달 19일 산업은행의 정체성 논란이 왜 끊이지 않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일어났다.
산업은행은 이날 최우수 고객 120명을 고급 한정식 음식점인 서울 종로구 ‘삼청각’에 초대했다. 칵테일 리셉션을 시작으로 1인당 8만 원이 넘는 한정식에 이어 민속주와 일품요리를 곁들여 전통 공연을 감상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술과 부대비용을 뺀 식사비만 1000만 원이 넘었다.
이 은행 관계자는 “창립 52주년을 맞아 고객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자리였다”며 “시중은행들은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중은행 프라이빗뱅킹(PB) 영업을 답습하는 것은 국책은행의 본분을 잊은 행위라는 지적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날 리셉션에 대해 지난달 25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의 발언에 빗대 “부자 고객들과 술판 벌이는 게 국책은행 본연의 임무냐”고 되물었다.
김 총재는 당시 “국책은행으로서 공익성과 상업성이 중복될 때면 공익을 우선하면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시중은행 영역 침범한 ‘공룡’
![]() |
대우증권에 이어 자산운용회사(산은자산운용, 한국인프라자산운용)까지 인수해 자회사가 6개나 된다. 그야말로 금융계의 ‘큰손’이다. 프라이빗뱅킹 영업을 하면서 펀드와 보험도 팔고 있다.
2000년에는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합작해 ‘LSF-KDB’라는 법인을 만들어 부실채권 처리에 나서 “투기자본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회사채 시장에서도 우량 물건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산업은행은 ‘공룡’으로 불린다. 이러다 보니 “하는 일은 시중은행인데 행세는 식산은행(산업은행의 전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중소기업 자금공급 실적은 미미하다. 1분기(1∼3월) 중소기업에 공급한 자금은 8102억 원으로 올해 목표(6조 원)의 13.5%에 그쳤다. 혁신형 중소기업 특별지원액도 목표액(2조5000억 원)의 15.4%인 3846억 원에 머물렀다.
○ 정체성 논란
최근에는 정체성 논란을 넘어 ‘산업은행 폐지론’으로 번지고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개발은행’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므로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
검찰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수사에서 박상배 전 부총재가 부실채권 매각과 관련해 돈을 받은 혐의로 체포된 것을 계기로 국회 재경위에서는 의원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민주당 김효석 의원은 “할 일은 사라졌는데 똑똑한 사람은 너무 많으니 자꾸 민간영역 인수합병이나 사모투자펀드에 기웃거리는 것 아니냐”고 핵심을 찔렀다.
열린우리당 정덕구 의원은 “산업은행이 예전에 떡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제 떡이 아니라 냄새나는 오물로 변해 산은에 짐이 되고 있다”고 비꼬았다.
○ 어떻게 변해야 하나
산업은행의 진로에 대해서는 △완전 민영화 △투자은행(IB)으로 전환 △민간영역과 겹치는 분야의 민영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산업은행이 3월 말 한국금융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한 ‘산업은행의 역할 재정립과 향후 발전방향’에 대한 보고서가 나오면 국책은행 전반에 대한 검토를 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기업금융 분야에서 독보적인 산업은행의 강점은 살려야 한다는 것.
건국대 고성수 교수는 “기능개편 논의는 산업은행의 경쟁력을 살리면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검토돼야 한다”며 “국책은행으로서 축적해 온 브랜드 파워와 노하우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프로젝트 파이낸싱, 회사채 발행 주간, 파생상품 거래, 금융채(산업금융채권) 발행, 벤처 투자, 해외 차입 등에서 1위에 올라 있다. 기업 인수합병에서도 국내 금융회사로는 최고라는 게 금융계의 평가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과거 시중은행이 수행할 능력이 없던 분야가 상당수”라며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