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무성하게 크길 바란다는 뜻의 버드나무 그림은 한국 제약산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 환원과 봉사 정신으로 한길을 걸어온 유한양행. 지금 이 회사는 상대적 사세(社勢) 위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 “기업은 이 나라-이 사회의 재산”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다.’
유한양행의 역사는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그는 ‘기업은 사회의 공기(公器)’란 신조로 경영에 임했다. 정직, 또 정직을 강조하고 이를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따라다닌다.
1930년대 영업망 구축을 위해 만주 지역을 다녀온 회사 간부가 “마약 중독자가 늘고 있으니 우리도 모르핀을 생산하면 이익이 많이 남을 듯하다”고 보고하자 그가 크게 호통 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년(晩年)에는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을 설립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1971년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이 전부.
회사도 안티푸라민, 삐콤씨와 같은 히트 상품을 개발하고 유한킴벌리, 한국얀센 등 합작사를 만들며 발전을 거듭했다.
유 박사는 지금까지도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박사님은 늘 ‘이 회사는 이 나라, 이 사회의 재산입니다’라고 말씀하셨죠. 돈 벌어 개인 재산 늘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지.”
홍병규(91) 유한재단 이사의 말이다. 그는 1932년 유한양행에 입사해 75년째 일하고 있는 유한양행의 산증인이다.
○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다
기업가 정신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유한양행은 창립 이후 6·25전쟁 기간을 제외하고는 ‘무(無)적자 신화’를 유지하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추진력 있는 ‘오너 경영자’가 없다 보니 사세 확장이나 글로벌화에는 다소 미흡했다는 평가도 있다.
1960년대부터 ‘박카스’를 앞세운 동아제약에 추월당한 데다 최근에는 제약업계 매출액 2위 자리도 위협받고 있다.
한화증권 배기달 연구원은 “사회 공익적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연구개발이나 글로벌화에 집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작은 생활기업 이미지에서 벗어나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한양행은 창립 80주년을 맞아 연구개발본부 통합, 충북 청원군 오창공장 준공 등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해 ‘100년 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차중근 사장은 “창업자가 강조한 정직과 신용의 기업문화는 꾸준히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며 “80주년을 전기로 삼아 새 사업 기회 창출과 연구개발 조직 강화로 시대 변화에 대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유한양행이 걸어온 길▼
1928년 동아일보에 최초의 광고(염료) 게재
1933년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시판
1936년 법인체 주식회사로 발족, 경기 부천시 소사공장 준공
1957년 국내 최초의 항생물질 제품 생산
1962년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 상장
1963년 영양제 ‘삐콤씨’ 시판
1970년 유한킴벌리 설립, 유한재단 설립
1977년 주식회사 유한코락스 설립
1983년 주식회사 한국얀센 설립(미국 존슨앤드존슨과 합작)
1997년 서울 동작구 대방동 본사 신사옥 준공
2005년 경기 용인시 기흥읍 중앙연구소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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