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봉사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대가 없이 나눠주는 것이 참봉사의 마음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기업에서 묵묵히 맡은 일에 종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웃을 챙기는 직원들이 있다.》
○ LG전자 ‘봉사의 달인’ 김영기 부사장
헌혈버스 보면 피뽑고… 달동네 연탄배달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앞에 헌혈 버스가 도착했다. 잠시 뒤 LG그룹 사내에 헌혈을 권유하는 방송이 흘렀고, 중년의 신사 하나가 가장 먼저 버스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팔을 내민다. 뒤이어 도착한 직원들은 이 중년 신사를 알아보고는 “역시”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LG전자 내에서 ‘봉사의 달인’으로 통하는 김영기(HR부문장·52) 부사장. 봉사에 무슨 ‘달인’이 있겠느냐마는 그는 봉사라는 말만 들으면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특이한 사람으로 통한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어찌 남에게만 기쁨을 주는 일이겠느냐”는 말에서 그의 봉사철학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겨울, 영하 16도의 추위 속에 김 부사장은 사내 자원봉사자들 100명과 함께 연탄을 전달하기 위해 한 ‘달동네’를 찾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연탄을 나르던 그에게 한 할머니가 “고생이 많다”며 전기밥솥에서 요구르트를 꺼내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요구르트에서 봉사활동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사장이라는 직책의 무거움도 봉사라는 단어 앞에서는 훌훌 털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봉사 현장에 서 있는 그의 표정은 들뜬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김 부사장은 특히 전사적인 봉사활동에 노조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 사회봉사를 통해 상생의 노사문화를 사내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노조와 함께 성과급의 일부를 갹출해 ‘노경사회봉사기금’ 30억 원을 조성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돼 LG전자의 노사는 별다른 다툼 없이 원만하게 현안을 처리해 오고 있다.
김 부사장은 봉사의 참뜻이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짬을 내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다가가 보세요. 도움을 받는 이들이 느끼는 감사함보다 자신 스스로가 느끼는 기쁨과 만족감이 더 커집니다. 봉사는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큰 사랑의 문이 열리게 하는 아름다운 선물인 셈이죠.”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 장애아에게 수영 가르치는 현대차 원준희 기사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엔진보전부 원준희(45) 기사는 3년째 매주 월요일 오후 수영장으로 출근한다. 남을 돕는데 돈 대신 자신 있는 수영 실력과 시간, 그리고 약간의 수면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시간이나 잠보다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이 회사 봉사단체인 ‘한마음 봉사회’ 회원들과 함께 매주 초등학생 장애아 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다. 엔진가공장비의 유지·보수업무를 담당하는 원 기사는 야간 근무를 끝내고 아침에 퇴근해 잠시 눈을 붙인 뒤 바로 수영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출근하는 고된 일정이지만 봉사에서 얻는 보람 때문에 그만두지 못한다.
“해병대 출신이어서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일단 대한적십자사에서 주는 ‘라이프 가드(수상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로 했습니다. 5년 전 어렵사리 자격증을 딴 뒤 우연히 아산시청 사회복지과 직원을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수영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아산에 있는 장애인 학교인 인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언어장애를 가진 학생도 있고 팔, 다리가 불편한 학생도 있다. 뇌성마비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아도 있다.
하지만 물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어느 누구보다 초롱초롱하다. “혼자서 물을 헤치면서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보면 마치 내가 부모가 된 것처럼 기뻐요.”
그의 ‘맨투맨’ 지도 방식은 장애아 뿐 아니라 장애아 부모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몸이 불편한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일은 보통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일. 전문 수영 강사도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중간에 그만두기 마련이다. 그만큼 힘든 일이지만 봉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봉사는 돈보다 마음이 우선 아닙니까.”
그는 “우리 사회가 장애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했으면 좋겠다”며 “대화를 통해 신체장애 장벽을 허물고 이웃이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 루게릭병 앓는 SK케미칼 이현수 차장
“남들에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훨씬 많이 얻어가는 게 사회봉사인 것 같아요. 사람도 변하게 만들죠.”
SK케미칼 수원연구소 특허분석팀의 이현수(53) 차장.
그는 병을 하나 앓고 있다. 흔히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근위측증이다. 근육의 힘이 점점 떨어져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몹쓸 병이다. 특별한 치료법은 없다.
한때 유도를 했을 정도로 건강했던 그가 이 병을 앓은 게 벌써 20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직장생활을 잘 해내고 있다.
선진 연구소의 기업관리 기법을 연구하거나 회사에 도움이 될 외국자료를 찾는 등 주로 앉아서 하는 일이기에 업무에 큰 무리가 없다고 한다. 물론 출퇴근 등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가족이나 직장동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몸이 불편해 주위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이지만 이 차장은 SK케미칼 자원봉사 모임 ‘줄란’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사람들을 모아 어느 곳에 가서 어떻게 사회봉사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그의 몫이다.
이 차장이 사회봉사를 시작한 건 3년 전. SK그룹 전 계열사에 봉사활동 바람이 불자 15명의 자원자를 모아 봉사모임을 만들었다.
수원시 자원봉사센터의 소개로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에 사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손자 1명을 혼자 데리고 사는 독거노인이었다.
“나도 몸이 불편한데 할머니께 해드릴 게 뭐 있겠습니까. 그냥 자장면 사 드리고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하는 것뿐이죠. 지금도 한 달에 두 번씩 찾아뵙는데 그렇게 기다리십디다. 사람에 대한 갈증이랄까. 나이 드신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죠.”
그는 이 할머니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 얘기도 했다.
“한번은 할머니가 직접 자수한 액자를 주시더군요. ‘고맙습니다. SK’라고 써 있었습니다. 밑그림은 손자가 그렸다고 하더군요. 그 선물을 받고 펑펑 울었습니다.”
이 차장은 동료들과 함께 회사 안에 커다란 돼지저금통을 설치해 매년 저금통을 깨서 모은 돈으로 연탄을 사서 노숙자 보호시설에 보내주기도 한다. 나눔은 정말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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