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회장 “앞만 보고 달리다 뒤 못돌아봐”

  • 입력 2006년 6월 2일 03시 03분


“한국에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만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 왔습니다. 미처 뒤를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해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를 일으킨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합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정몽구(사진)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1일 열린 첫 공판에서 이같이 말했다.

정 회장은 파란색과 보라색 세로무늬가 이어진 수의를 입고 법정에 들어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들에게 차례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법정은 서울중앙지법에서 가장 큰 417호 대법정. 좌석 190석은 오전 10시 재판이 시작되기 전 가득 찼다. 방청객 100여 명은 법정 복도에 서서 재판을 지켜봤다.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과 이전갑 현대차 부회장 등 그룹 임직원들이 방청객의 대부분이었다.

▽“비자금 797억 원 횡령하고 4000억 원 손실 회사에 떠넘겨”=검찰은 정 회장이 현대차 본사, 기아차 등 6개 계열사를 통해 1034억 원의 비자금 조성을 지시하고 이 가운데 797억 원을 가족 생활비, 불법 정치자금 등에 사용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또 정 회장이 항공산업에 대한 개인적 애착을 앞세워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 실패한 책임을 현대차와 현대정공 등 계열사에 떠넘겨 회사에 4000억 원대의 손실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정 회장이 △채무를 편법으로 탕감 받은 ㈜본텍을 계열사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본텍 주식의 헐값 매입을 주도하고 △말레이시아 라부안 등 국제 조세 피난처에 서류상으로 펀드를 만들어 비자금 조성을 지시한 혐의 등을 입증하겠다고 말했다.

▽“비자금 조성은 관행, 회사 손실은 불가피”=정 회장의 변호인들은 “정 회장이 전략적 차원에서 그룹 발전 방향이나 사업의 틀을 결정했을 뿐이며 구체적이고 일상적 업무는 계열사 임직원들이 집행했다”고 주장했다.

대법관 출신 정귀호 변호사, 올해 2월 부산고법원장으로 퇴직한 김재진 변호사, 서울서부지법 부장판사로 퇴직한 박순성 변호사, 김&장 법률사무소 신필종 변호사가 정 회장의 변호를 맡았다.

이들은 본텍 주식 헐값 매입과 관련해 “사실 관계가 상세히 심리 검토돼야 한다”며 진위를 가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또 계열사 출자 등 배임 혐의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국가 부도 위기에서 그룹 존립을 위한 경영 판단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가 핵심”이라며 “재판부가 ‘큰 틀’에서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진정서 트럭 2대 분량=재판부가 “비자금 용처를 밝혀진 대로 특정해 달라”고 요구하자 검찰은 “수사가 진행 중이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본텍 주식의 실제 가치를 특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변호인들에게 “트럭 1, 2대 분량의 진정서가 들어온다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상의해야겠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기소된 지난달 16일부터 1일까지 재판부에 제출된 진정서(탄원서)는 이미 250여 건에 이른다.

변호인들은 정 회장이 지난달 24일 만성 기관지염에 따른 호흡곤란 등으로 인해 병사(病舍)동에 수감되어 있으며 고령(68세)이라는 점을 들어 재판부에 여러 차례 보석 허가를 요청했다.

이날 공판에서는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본격적인 다툼은 없었다. 검찰이 비자금 용처 수사 등이 마무리되지 않아 수사기록을 아직 재판부에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공판은 12일 오후 2시.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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