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들은 곧장 중국으로 건너가 박 씨의 주변을 탐문했다. 박 씨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차장 관리원, 음식점 배달원으로 위장해 박 씨에게 접근해 갔다. 3개월의 추적 끝에 전직 기술이사 2명과 현직 사외이사까지 연루돼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검찰과 국정원은 2350억 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빼돌리려고 한 4명을 검거해 지난달 28일 기소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산업 기밀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쪽과 이를 차단하려는 정보 당국 간의 ‘총성 없는 첩보 전쟁’이 국경을 초월해 세계 시장 곳곳에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첩보의 단서는 대부분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해당 업체에서 벌어진 사소한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2004년 5월 적발된 휴대전화 업체 P사의 기밀 유출 사건은 20대 여직원이 1000만 원이 넘는 성과급이 지급되기 한 달 전에 별다른 이유 없이 회사를 그만둔 것을 의아하게 여긴 데서 추적이 시작됐다.
국정원은 여직원의 행적을 뒤쫓다가 8명의 연구원이 회사를 차례차례 그만두고 최신 휴대전화 제조기술을 홍콩 업체에 넘겨주려 한다는 정보를 포착해 유출 직전에 검찰과 함께 이들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이 유출됐다면 연간 1조5000억 원의 피해가 예상됐다.
S사 주변을 조사한 결과 이사 승진에서 탈락한 정모 씨를 주목하게 됐고,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정 씨의 후배가 “PDP 관련 기술을 넘기면 건당 2억 원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한 사실을 알아냈다. 남은 것은 증거를 확보하는 일.
국정원은 정 씨가 우편을 이용해 기밀 자료를 해외로 보낼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며칠 동안 정 씨가 사는 집 주변의 우체국 20여 곳에서 모든 우편물을 일일이 검사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다. 최후 수단으로 정 씨의 개인 컴퓨터를 압수수색해 회사의 핵심 기밀을 보관하고 있던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국정원이 2003년 이후 올해 6월 말까지 적발한 해외 기술 유출 사례는 총 72건. 이 중 54건(75%)은 반도체와 휴대전화 관련 기술이다. 최근에는 중소기업의 부품 소재 등 기술 분야까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 기밀 유출방지 3內원칙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은 대부분 회사 내부자에 의해 이뤄진다. 2003년 이후 적발된 72건 가운데 전현직 직원이 유출한 사례는 65건이다.
국가정보원과 기업 관계자들은 중요 기술 관련 자료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에 두고(시내·視內), 결재를 할 때는 손 안에(수내·手內), 보관을 할 때는 보관함에(함내·函內)에 두라는 ‘3내(三內) 원칙’을 제시한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기밀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빈손으로 출퇴근할 것 △‘너만 알고 있어’라며 비밀을 흘리지 말 것 △작은 정보라도 경쟁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할 것 △컴퓨터에 바이러스 예방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것 △외부에 e메일로 자료를 보낼 때는 반드시 회사 계정을 이용할 것 등을 권고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고경영자(CEO)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기술 유출은 한순간에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CEO부터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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