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이 지난해부터 한국 주식 매도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작년부터 올 7월까지 무려 10조6000억 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매도 금액이 매입 금액보다 큰 것)했다. 1992년 국내 주식시장이 개방된 이후 처음으로 사실상 2년 연속 순매도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본보가 증권 전문가 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전문가들은 대개 외국인들의 ‘탈(脫)한국’ 현상이 하나의 장기 추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외국인들의 주식 매도세가 더 크고,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증시에서는 2000년과 같은 혼란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당장 큰 문제가 없다고 안심해도 좋을까.
○ ‘증시의 주인공이 바뀌다’
3일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투자가는 올해 들어 7월까지 6조3786억 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이는 작년 한 해 동안의 순매도액 4조2232억 원보다도 2조 원 이상 많다.
외국인 매매 기록이 집계된 1995년부터 외국인이 연간 단위로 주식을 순매도한 것은 2002년과 2005년 단 두 차례였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처음으로 2년 연속 한국 주식을 사들인 금액보다 내다판 금액이 많을 것이 확실시된다.
외국인이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2004년 7월 43.88%까지 치솟았던 외국인 비중은 2일 현재 38.95%까지 떨어졌다. 외국인들의 매도 공세가 장기 추세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적지 않다.
본보가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장, 투자분석부장과 자산운용사의 주식운용본부장 등 5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42명(80.8%)이 ‘앞으로 외국인이 주식을 더 팔 것’이라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27명(51.9%)이 ‘외국인은 주식 비중을 30% 선까지 줄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앞으로 외국인이 약 68조 원의 주식을 더 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간접투자를 중심으로 한 내국인의 부상(浮上)이 두드러진다. 간접투자 계좌는 올 6월 말 현재 1174만 개로 늘어났으며 이 가운데 적립식 펀드가 704만 개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비중이 낮아지면서 국부(國富) 유출 논란도 크게 가라앉았다.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증시를 통해 증가한 내국인(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가)의 금융자산은 194조9740억 원이었다.
이에 반해 지난해 외국인의 금융자산은 97조8340억 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내국인의 자산 증가가 외국인 자산 증가의 갑절이나 됐다.
○ 외국인의 ‘한국 이탈’은 속도가 중요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1년 반 동안 국내 증시가 외국인의 한국 이탈 추세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외국인들이 쏟아낸 10조6000억 원가량의 매물을 국내 기관들이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 비중이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30% 선으로 떨어진다면 외국인 매물은 약 68조 원에 이른다.
한화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외국인이 주식을 장기적으로 천천히 자연스럽게 파느냐, 아니면 한꺼번에 팔아치우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이런 전망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은 외국인들이 주식을 파는 이유에 대해 ‘외국인 지분이 이미 너무 높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차익을 실현하고 있다’(28명)는 답이 가장 많았다. 이 경우는 단기간에 외국인이 대거 주식을 파는 ‘셀 코리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내 경기가 악화될 것 같아서’(20명)와 ‘대북 긴장 고조 및 노사관계 악화 등 투자 분위기가 나빠져서’(15명)라는 답도 그 다음으로 많았다. 경기가 나빠지고 투자 분위기가 악화된 것이 주 원인이라면 이는 ‘셀 코리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도 메가톤급이 될 수 있다.
○ 철저한 준비가 필요
증시 전문가들은 지금부터라도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버팀목이 되는 증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본보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복수 응답 가능)의 31명은 이를 위해 ‘과감히 금융 규제를 풀어 금융기관의 대형화를 유도하고, 다양한 상품을 내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다.
25명은 ‘건전한 장기투자 문화 정착’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고, ‘경기 진작을 통해 국내 주식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22명), ‘투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18명)가 그 뒤를 이었다. ‘국내 금융기관이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17명)는 조언도 적지 않았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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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투명성 높이기-주주경영 정착 기여
M&A로 산업계 교란… 거액 챙기고 떠나
외국인투자가들이 국내 증시를 본격적으로 좌지우지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금융시장을 완전히 외국인에게 개방했다.
1998년 이후 외국인이 한국 증시를 주름잡으면서 남긴 가장 큰 순기능은 국내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주주 우선 경영을 정착시킨 점이다.
기업의 경영 정보를 투자자에게 공정하게 공개하는 공정공시 제도가 정착된 것도, 기업이 배당과 자사주(自社株) 매입 등으로 주주를 배려하는 경영을 펼치기 시작한 것도 외국인투자가의 약진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
우선 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지나치게 외국인을 배려해 국내 기업의 경영권이 위협을 받은 것은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 최근 뒤늦게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보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미 몇 년 동안 외국인은 인수합병(M&A)을 무기로 국내 산업계를 여러 차례 교란시켰다.
또 금융시장에서 외국인이 받는 혜택이 커지면서 외국계 자본이 정작 실물 투자는 기피하고 주식만 사 모으는 현상이 심해진 것도 문제였다.
굿모닝신한증권 김학균 연구원은 “외국인의 투자가 활성화됐다고 하지만 기업에 자금을 대고 설비투자를 하는 ‘직접 투자’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적지 않은 외국인이 주식을 샀다 팔아 차익만 챙기고 떠났다”고 말했다.
외환은행 최대주주였던 론스타 펀드, 제일은행을 매각한 뉴브리지캐피털, 한미은행을 사고팔았던 칼라일펀드, 서울증권을 매각한 퀀텀펀드 등은 국내 산업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식만 사고팔아 차익을 챙겼다.
국내 기업들이 외국계 주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늘리면서 국내 산업이 역동성을 잃어버린 것도 자주 지적되는 문제점이다.
거래소 상장기업이 지난해 자사주 매입에 들인 돈은 4조8305억 원이나 된다. 올해 4월 이후 삼성전자는 자사주를 사는 데 1조8582억 원을 쏟아 부었는데 이는 2분기(4∼6월) 영업이익(1조4200억 원)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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