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콕 찍는 ‘소송 괴물’…무역경쟁력 흔들

  • 입력 2006년 8월 18일 03시 09분


요즘 미국의 로펌 업계에서 한국의 수출기업은 ‘딥 포켓(Deep Pocket·깊은 주머니)’으로 불린다. ‘딥 포켓’은 돈이 많아 배상을 할 여력이 큰 상대방을 일컫는 미국 법조계의 은어. 한국 기업이 미국 소송사냥꾼들의 먹잇감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전자와 같은 업종인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소니의 미국 내 소송 건수와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이런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액 57조 원에 영업이익 8조6000억 원을 벌어들였고, 소니는 매출 74조 원과 1조912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영업실적만 보면 단연 삼성전자가 소니를 앞선다.

하지만 ‘법률 리스크(legal risk)’의 관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소니가 삼성보다 한 수 위다.

본보가 17일 미국 유료 법률정보사이트 ‘렉시스’(www.lexis.com)를 통해 2000년부터 작년 말까지 삼성이 미국에서 제소 또는 피소된 사건 수를 조사한 결과 275건에 이른다. 반면 소니는 같은 기간 137건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내용은 차이가 더 크다. 소니는 특허, 고용,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사건이 대부분. 그러나 삼성은 소송에서 지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반독점 특허 관련 사건의 비중이 50%를 넘는다. 또 소니는 대부분의 사건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소송을 낸 당사자인 반면 삼성은 피고로 법정에 선 사건이 많았다.

IT뿐만이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기아차의 경우 지난 6년간 미국 법원에서 183건의 송사에 휘말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제조업체 닛산은 같은 기간 87건의 사건으로 제소 또는 피소됐다.

현대·기아차와 닛산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올해 4월 말 각각 4.4%, 6.8%로 집계되고 있다. 미국 시장 점유율은 현대·기아차가 2.4%포인트 낮지만 소송 건수는 두 배가 넘는다.

2000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삼성을 포함해 하이닉스 현대차 LG그룹 대한항공 포스코 등 국내 주요 6개 기업이 미국 내에서 제소 또는 피소된 사건은 모두 694건에 이른다. 갈수록 한국 기업의 수출 환경이 나빠지고 있는 가운데 지금처럼 ‘딥 포켓’ 노릇을 하다가는 경쟁력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이 기업 법무팀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국내 로펌에서 근무하는 한 미국계 변호사는 “한국 기업의 원천기술이 부족해서 각종 소송에 시달리는 점도 있지만 미국 기업이나 로펌들이 한국이 법률 리스크 관리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전략적 차원에서 특허 및 반독점 관련 소송을 내서 라이벌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권혜진 기자 hj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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