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에 멍드는 美수출기업]<下>공포의 반독점법

  • 입력 2006년 8월 19일 03시 00분


《“미국 의회는 2004년 반(反)독점법을 위반할 경우 징역형의 최고 형량을 3년에서 10년으로 늘렸다. 벌금형은 법인의 경우 1000만 달러에서 1억 달러로, 개인은 3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로 강화했다.” 최근 열린 국내 세미나에 참석한 한 미국 변호사는 이같이 전했다. 반독점법은 기업들이 담합이나 제휴 활동을 통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행사하거나 시장 내 경쟁을 저하시킬 경우 엄격히 규제하는 법. 본보가 미국 법률유료정보사이트 ‘렉시스(www.lexis.com)’를 통해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들이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 연방법원에 제소 또는 피소된 694개의 사건에서 반독점법과 관련한 사건이 135건(19.44%)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거액 벌금에 징역형까지=3월 국내 산업계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 임원들이 미국에서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자 큰 충격을 받았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각각 3억 달러와 1억8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벌금을 내는 것도 모자라 임원들이 징역까지 살아야 한다는 데 대해 국내 산업계에서는 억울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법인뿐만 아니라 개인에게까지 이렇게 가혹한 책임을 묻는 것은 가격담합 행위를 ‘시장경제를 해치는 중죄(felony)’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

미국 내 정부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반독점법을 위반하면 4가지의 민사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제품의 직접소비자와 간접소비자, 제품이 판매된 주(州), 해외소비자 모두가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낼 수 있다. 직간접 소비자는 피해액의 3배까지 청구할 수 있다. 반독점 행위가 적발되면 회사로서는 적어도 10년 이상 갖은 송사에 골머리를 썩어야 한다.

실제로 지난해 D램 가격 담합과 관련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소송 합의금으로 삼성전자는 6700만 달러를, 하이닉스는 73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이는 사건 당사자 일부와 합의된 금액일 뿐이어서 앞으로 합의금액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FBI도 반독점 감시에 나선다=미국 법무부가 3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임원들에 대한 형사처벌 방침을 밝히면서 앞으로 기업의 반독점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미 연방수사국(FBI)과 협조해 적극 감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같은 달 테러방지법(PATRIOT Act)을 개정하면서 가격담합과 같은 반독점법 위반 혐의 사안에 대해 수사기관의 광범위한 감청을 허용하는 조항을 신설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제단체인 자유무역의회(Voluntary Trade Council)의 의장인 S M 올리비아 씨는 “이미 모든 반독점법 위반 사건에서 승소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미국 정부가 감청 조항까지 신설하면서 반독점법은 이제 대량살상무기와 같은 위력을 지니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1998년 이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회사의 절반이 외국계 기업이었고 개인의 경우 25%가 외국 국적이었다. 또 2001년부터는 반독점법 위반 혐의가 있는 개인에 대해서는 인터폴과 협력해 혐의자를 인도받을 수도 있다.

▽‘자국 이기주의’인가 ‘시장경제 수호’인가=미국은 외교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해 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통상 분야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미국과의 거래에서 공정거래법이 수출 기업과 국가를 통제하고 옥죄는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미국은 전 세계 항공화물 운송업계에 대한 가격담합 혐의 조사에 나섰다. 한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뿐만 아니라 일본 프랑스 등 대부분의 항공사가 조사선상에 올랐다.

미국은 각국 공정거래위원회에 담합이 의심되는 자국 기업에 대한 공동 조사를 요구했다. 일본은 미국의 이 같은 제의에 응하지 않았지만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적극적으로 조사에 참여했다.

이에 대해 왕상한 서강대 법학과 교수는 “미국 정부가 자국의 자유시장경제와 소비자를 지키기 위해 남의 나라 주권과 국제법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 반독점법을 위반한 것으로 의심되는 기업에 대해 감청을 허용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이라크전쟁 등 무력행사로 입은 손해를 금융이나 무역에서 보상받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호선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반독점법이 시장 및 소비자 보호와 동시에 자국 이기주의의 도구로 쓰인다는 의심도 받지만 글로벌 시장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편 본보가 18일 보도한 ‘한국기업 콕 찍는 소송괴물’ ‘소송에 멍드는 미 수출기업’(A1·3면) 기사에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6개 주요 한국 기업의 소송 건수는 연방법원에만 제기된 사건이며, 삼성전자가 아닌 삼성그룹과 소니의 소송건수를 비교한 것이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대화 조심하고 e메일 저장하라”

공정거래법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임직원들이 가격담합 혐의로 실형을 살게 된 것과 관련해 “국내 기업들이 영업 과정에서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거액의 벌금은 물론 실형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하이닉스의 경우 컴퓨터 및 서버 생산업체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가격담합을 위한 회의, 대화와 통신을 통한 적정 가격 합의, 그리고 결정된 가격을 준수하고 이행하는지 감시할 목적의 정보교환 행위 등이 반독점법에 위반되는 범죄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미국 반독점법에서 가격담합은 의도적으로 상호 의사소통을 통해 사업자들끼리 구체적인 협정을 체결할 경우에만 중죄로 처벌한다. 시장 내 다른 선두주자가 내세운 가격을 뒤따라가는 행위는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부터 해외, 특히 미주지역 마케팅과 영업담당 직원들에게도 엄격한 법률 교육을 하고 있다.

해외 콘퍼런스나 업계 모임에 참석할 경우 모든 일정을 회사에 보고해야 하고 영업 상대방이 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사적 만남을 자제해야 한다. 업무상 주고받은 e메일 내용도 다 저장하도록 내부 지침을 만들어 미래에 불거질 수도 있는 가격담합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준법강령을 제정해서 마케팅과 해외 영업 인력을 대상으로 법률리스크 관리 교육을 하고 있다. 특히 가격담합과 관련해 해당 국가의 법을 위반했을 경우 당사자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냉엄한 시장경제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한국 기업이 현지법을 준수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것.

왕상한 교수는 “현 반독점법의 기초가 된 셔먼법이 제정된 1890년부터 반독점 행위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처벌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미국 정부의 해외 기업에 대한 엄격한 법 적용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국내 기업들은 법률리스크 관리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셔먼법

1890년 미국 연방의회에서 국내외 시장에서 독점 및 거래 제한을 금지하기 위해 제정한 미국 최초의 독점금지법. 시장 경쟁의 대헌장으로 불리는 셔먼법은 국내외 거래를 제한할 능력을 갖춘 기업 간에 이뤄지는 어떤 형태의 연합도 불법이고 미국에서 이뤄지는 거래 또는 통상에 대한 어떤 독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핵심 조항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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