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인 발목 잡는 시스템 개선 시급
재계에서는 최고 세율 50%, 기업지분을 상속할 때는 65%까지 이르는 상속세가 한국 기업인의 발목을 잡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데 별로 이견이 없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미국 등 선진국들이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이유는 과도한 상속세가 기업인들의 ‘이윤추구 동기’를 훼손해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구멍가게’ 수준을 갓 벗어난 기업까지 상속을 위해 탈법, 불법을 저지르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서둘러 개선해야 한국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다른 세금 문제도 만만찮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모 사장은 며칠 전 관할 세무서장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세무서에서 만난 세무서장은 “매년 흑자를 내더니 올해는 적자로 신고하셨네요. 제대로 된 겁니까”라고 물었다.
창업 때부터 ‘정직하게 사업하자’는 모토를 내걸었던 김 사장은 세금 잘 내는 업체로 꼽혀 10여 년간 세무조사를 받지 않았다.
“올해 시설을 교체하느라 많은 돈을 들였고 불황이 겹쳐 7년여 만에 적자를 냈다”는 김 사장의 대답을 들은 세무서장은 “관내 기업들이 대부분 적자라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아무래도 세금을 더 내라는 말처럼 들린다”면서 “분식회계라도 해서 적자를 흑자로 바꿔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가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나 ‘균형발전’이라는 현 정부의 정책방향 때문에 풀리지 않는 수도권 과잉규제 등도 기업 투자의 발목을 잡는 문제점으로 꼽힌다.
○ 직장에선 신구 세대 조화 이뤄야
“젊은 사원들이 좋아하는 ‘작업의 정석’ 같은 영화를 같이 보러 가라. 드라마 ‘주몽’이 뜨면 주몽을 열심히 본 후 사원들에게 말을 걸어라. 젊은 사원들의 근로의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쓰는 ‘언어’로 같이 얘기하고 자주 칭찬해 줘라.”
LG화학 HR부문장인 육근열 부사장은 팀장급 리더십 강화 교육을 할 때마다 이렇게 강조한다. 젊은 세대들의 창의성과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회사는 올해부터 입사 2년차 미만인 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 ‘투게더 과정’을 신설했다. 젊은 사원들이 선배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선배들의 경험을 배우고 미래의 ‘비전’을 세우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CJ그룹은 2000년 직책에 관계없이 사내의 모든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과거의 호칭이 나이든 직원과 젊은 직원들의 대화를 가로막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신동휘 CJ그룹 홍보실장은 “초기에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바뀐 호칭이 완전히 정착됐다”면서 “나이와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젊은 세대의 창의성과 기성세대의 경험을 결합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규제만 늘리고 인센티브는 없어
“1970년대까지 ‘포니급’이던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중반에 ‘쏘나타급’으로 성장해 신나게 가속페달을 밟다가 외환위기라는 대형사고를 맞았습니다. 안팎에서 ‘브레이크가 부실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쏟아졌어요. ‘좋은 차는 엔진이 아니라 브레이크가 좋아야 한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이 났고 각종 규제가 강화됐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경제연구소 임원은 “지금 한국 경제는 ‘쏘나타급’ 엔진에 ‘에쿠스급’ 브레이크를 단 꼴이 됐다”고 진단한다.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끌던 ‘고위험, 고수익(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투자가 금기시되면서 ‘경제의 조로(早老)’로 이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성장 수준에 맞춰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의 실력과 수준을 넘어서는 기업에 대한 요구는 기업가의 도전 정신을 꺾는다고 본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진국인 한국의 경제 주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히 다시 뛰지 않으면 선진국 도약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성용 베인앤컴퍼니 대표는 “외환위기를 겪고 난 뒤 한국에 기업에 대한 선진국의 규제와 규범은 모두 들어왔지만 잘 뛰는 기업을 격려하는 ‘인센티브’ 시스템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기업이나 개인의 도전의식은 위험을 무릅쓰고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충분한 보상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재기위해 정부 문 두드렸지만 거듭 퇴짜”▼
김 사장은 1998년 대학원에 다닐 때 창업동아리 후배 5명과 ‘모주’라는 반도체장비 제조업체를 세웠다.
“대학 동기들은 대기업 계열 반도체회사에 취직했지만 제 생각은 달랐어요. 대부분의 반도체장비는 해외 기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력만 있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예상대로 승승장구해 창업 2년 만에 연매출 수십억 원을 넘보는 규모로 회사를 키웠다.
그러나 한 임원이 회사 돈을 빼돌리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 6억 원이 휴지조각이 됐다.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채무자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빚 독촉을 해댔습니다. 공장과 집까지 경매로 넘어갔지요.”
빚쟁이들을 피해 여관에서 생활하던 김 사장은 다시 재기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3개월 넘게 술독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죠. 흉기로 손목을 그은 적도 있습니다.”
그의 손목에는 아직도 깊은 흉터가 남아 있다.
도산했지만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을 돕기 위해 정부가 시행 중인 ‘벤처 패자부활제’에도 두 차례 문을 두드렸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기술력과 자신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잃지 않았다. 사업을 통해 쌓은 인적 네트워크도 힘이 됐다.
김 사장의 능력을 눈여겨본 노래방반주기 제조업체 아리랑멀티미디어의 사장 요청으로 2001년 그 회사 기술개발 담당 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노래방반주기 대신 반도체장비 개발을 시작해 회사를 확 바꾸어 놓았다.
그를 믿은 사장은 지난해 그에게 경영을 맡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요즘 김 사장의 얼굴엔 희색이 돈다. 산업은행에 회사 지분 8%를 넘기며 자금을 유치했고 연말에는 반도체 자동화공정 이송장치를 상용화할 예정이다.
“부족한 건 다시 채우면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밤 12시까지 연구실에 남아 일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니까요.”
박중현 기자(팀장) sanjuck@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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