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측은 즉각 “미국 측의 인식이 잘못됐다”고 반박했지만 미국이 공기업에 이어 일반 기업까지 거론하고 나서면서 한국 기업 전반의 지배구조와 경영 문제가 한미 FTA 협상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 ‘기업 규제 문제’ 논란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는 3차 협상 시작에 앞서 5일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웨스틴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의 요구는 한국의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모두 반(反)독점법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올해 4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주최로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FTA 공청회에서 미국의 제조, 자동차, 섬유업계 관계자들이 자국 정부에 요구했던 사항이다.
기업이 자유로운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자는 뜻에서 공정경쟁 관련 조항을 협정문에 넣는 것은 어찌 보면 원론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미국이 삼성이나 LG 등 한국 대기업 집단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는 이와 관련해 “대기업 집단 규제에 대해선 미국 측의 기본적인 인식이 분명히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나 공정거래법 등을 볼 때 국내에서는 재벌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더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다는 것.
국내 재계 관계자들도 “황당한 요구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욱 상무는 “국가간 협상에서 상대국 기업의 규제를 요구한 사례는 전혀 없었다”며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의도로 비상식적인 요청을 한 만큼 우리 정부도 절대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한국의 대기업은 수많은 규제를 받고 있다”며 “현 수준에서 규제를 더 강화하는 것은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무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이미 한국의 공정거래법이 대기업 집단 등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적용되고 있는 만큼 별도의 항목으로 이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일축했다.
한미 FTA 3차 본협상은 6일 시애틀에서 상품 농업 금융 등 14개 분야에서 공식 시작됐다.
미국 측은 양국이 유보안(개방 제외 리스트)을 교환했던 서비스·투자 분야에서 택배, 통신, 법률 등 10여 개 분야에 관심이 있다고 한국 측에 알려왔다.
택배는 페덱스 등 미국 업체의 한국 내 소규모 화물 택배시장 진입 문제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통신은 현재 49%로 묶여 있는 외국인 투자지분 제한 문제, 법률 분야는 시장 개방 시기를 앞당기는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의약품 건강보험 선별등재 시스템도 숙제로 남아 있다. 커틀러 대표는 “이달 중순부터 양국이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의약품 분야의 문제점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성적을 한국에서도 인정하자는 미국 측 주장에 대해 김 대표는 “(그렇다면) 한국의 수능시험 성적으로 하버드대에 입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개성공단 생산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양국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다.
다만 공기업도 민간기업처럼 시장가격으로 거래해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는 설립 취지에 맞게 기업활동을 하는 공기업은 문제 삼지 않기로 양국이 조율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한미 FTA에 반대하는 원정 시위대는 이날 회담장 부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거리행진을 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스티브 브라운 시애틀 서부지구 경찰서장은 “허가를 받은 시위라도 일반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교통이나 상업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 해산을 명령한 뒤 불응하면 체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폭력 시위로 얼룩졌던 점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시애틀=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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