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읍내에는 메이커(유명 브랜드 제품)를 파는 상점이 없어진 지 오래됐어요. 돈이 돌아야 말이죠.”
장항국가산업단지(장항산단) 착공이 17년이나 지연되면서 피해가 극심한 충남 서천군 장항읍을 찾았을 때 오혁성 장항읍발전협의회장은 곤두박질하는 지역경제를 한마디로 그렇게 표현했다.
정부는 1989년 금강을 사이에 둔 장항과 군산의 인접 바다를 매립해 산업단지(군산지구 480만 평, 장항지구 370만 평)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군산국가산업단지(군산산단)가 다음 달 준공식을 앞둔 반면 장항산단은 아직 착공조차 못했다. 최근에는 정부가 아예 사업 자체를 불허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나우찬 서천군발전협의회장과 정석구 장항읍발전협의회 부회장은 기자를 인근 수협 물양장과 장항국제항으로 이끌었다. 장항과 군산의 명암을 눈으로 보여주겠다는 것.
아직 전어와 멸치가 잡히는 계절이지만 수협 물양장은 빈집 같았다. 주변에 출항하지 않고 밧줄에 묶여 있는 소형 선박들이 즐비했다.
어민들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많이 떠났다. 군산산단 조성을 위해 금강 하구 둑을 막고 건너편인 군산 앞바다에 방파제를 세운 뒤 바다에 퇴적물이 쌓여 뱃길이 없어지고 어업 환경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장항항도 무늬만 국제항이었다. 수심이 얕아져 5000t급 이하의 선박만 접안이 가능했다. 그나마 물동량이 없어 크레인은 멈춰 섰고 부두는 텅 비어 있었다.
“1960년대 초반 국제항 준공식을 할 때만 해도 장항은 들떠 있었어요. 연예인이 대거 참석해 축하 공연을 화려하게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정 부회장이 장항산단 사업지구로 차를 몰자 군산과 장항의 대조적 현실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서천 해안은 개펄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반면 건너편 군산 해안은 공단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밤에 와보면 더욱 참담해요. 군산은 공단 불빛이 휘황한데 장항은 칠흑같이 어둡지요. 명암(明暗)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같아요.”
되돌아오는 길에 과거 ‘장항의 명동’이었다는 중앙로를 지났다. 간판만 덩그러니 걸린 채 영업을 하지 않는 상점이 3분의 1은 족히 돼 보였다.
김경제 장항읍상인연합회장은 “상권은 이미 군산으로 빨려 들어갔다”며 “이제 와서 환경문제 운운하며 장항산단을 백지화하려는 것은 장항 주민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서천군민의 상실감은 사실 이번만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6년 서천군 비인면에 십수만 평의 공업단지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지역민은 꿈에 부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지구가 경남으로 바뀌었다. 비인면에는 지금도 공업단지 화물 수송용 철도 건설을 위해 뚫었던 터널과 교각 등이 흉물처럼 방치돼 있다.
나소열 서천군수는 “정부가 이렇게 신뢰를 주지 못해서야 국민이 어떻게 믿겠느냐”고 분개했다.
서천지역 주민들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 2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장항산단조기착공추진위’는 지난달 24일 ‘장항산단착공대정부투쟁비상대책위’로 명칭을 바꾸고 금강 하구 둑 천막에서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장항산단 조성이 이처럼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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