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창의성과 활력 불어 넣어
2005년 11월 첫선. 전 세계 600만 대 판매.
유럽,미주,중국,아프리카 등 70여 개국에 수출….
올해 휴대전화가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열풍을 몰고 온 LG전자 ‘초콜릿 폰’의 간략한 명세서다.
‘인재 경영’ 특집기사목록 |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단말기로 세계를 평정한 이 제품의 디자인은 한국 여성의 손에 의해 완성됐다.
LG전자의 김진(46) 상무. 디자인연구소 책임연구원 진급 후 1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김 상무는 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이 기회 있을 때 마다 강조하는 성공 사례다.
“우수 여성인력을 디자인이나 연구개발 분야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김 부회장의 지론이다.
LG전자에는 ‘휴대전화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 인재가 또 한 명 있다.
지난해 임원으로 발탁된 류혜정(41) 상무는 2004년에 400만 대가 팔린 광대역부호분할다중접속(WCDMA) 휴대전화 성공신화의 주역이다.
SK케미칼의 홍윤희(45) 부장은 국낸 화학업계의 ‘여걸’. 미국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92년 이 회사에 과장급으로 스카우트됐다.
이후 고부가가치 폴리에스터 개발에 뛰어들어 회사의 주력 품목인 고기능성 수지 ‘스카이그린’ 개발을 주도했다.
삼성전자 양혜순(38) 책임연구원은 은나노 세탁기 개발에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은나노 세탁 공법은 삼성전자의 프리미엄급 세탁기에 모두 쓰이는 ‘알짜’기술.
경희대 화학과 출신으로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2002년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됐다.
국내 ‘최연소 여성 임원’기록을 보유한 SK텔레콤의 윤송이(31)상무는 이미 한국 여성 인재의 아이콘이 됐다.
○ 왜 여성 인재인가?
사실 어떤 기업이든 유능한 여성은 많다. 만약 찾지 못했다면 해당 기업 경영진이 여성 인력을 발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디자인 섬유 화장품 등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분야에서만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SK케미칼의 홍 부장과 삼성전자의 양 연구원은 보기 드문 여성 화학박사, 환경공학 전문가다. 왜 기업이 여성 인재를 중용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여성 인력이 활발히 일하는 기업일수록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미국 뮤추얼펀드인 시티즌스 펀드가 2004년 300개의 대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임원이 많은 기업의 연평균 주가수익률은 여성 임원이 적은 기업보다 3%포인트 높았다.
또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100대 기업 중 여성 관리직 비율이 높은 상위 10% 기업들은 1996∼2000년 주주 총수익률이 해당 산업의 평균보다 약 12배에 이른 반면 하위 10% 기업들은 0.4배에 그쳤다.
맥킨지는 이 결과를 토대로 “여성 인력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아지지 않는 한 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펩시, 존슨앤드존슨, 킴벌리 등 글로벌 기업들의 여성 임원 비율이 30∼50%에 이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한국 기업의 두꺼운 ‘유리 천장’
LG경제연구원은 여성 인력 활용으로 한국 기업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선택 가능한 고급 인재풀을 넓혀준다. 관행대로 남성 위주로만 인재 확보에 나서게 되면 이 기업은 ‘세상의 절반’을 포기하는 셈이다.
둘째, 다양성이 늘어나 조직의 창의적 혁신 능력도 향상된다. 신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효과다.
마지막으로 좋은 기업 이미지를 형성한다. 여성 인력 활용에서 앞서가는 기업은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펼쳐질 ‘여성 인재 확보전’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기업의 여성인력 비중도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여성인력 비율은 30% 수준. 요즘 주요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실력대로만 뽑으면 신입사원 중 여직원이 절반을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도 입사 후 승진을 거듭하다 보면 여성의 도약을 가로막는 두꺼운 ‘유리 천장’에 부딪치고 만다.
본보가 올 3월 삼성, 현대·기아자동차, LG, SK 등 국내 20개 주요 그룹의 직급별 여성 인력 비중을 조사한 결과 ‘기업의 꽃’으로 불리는 임원 4889명 중 여성은 0.9%(43명)에 그쳤다. 전체 직원 중 여성 비율은 18.6%로 이와 대조적이었다.
‘여자 임원’이라고 하면 아직도 언론이 대대적인 조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임신 육아 지원이 핵심
국내 기업들도 비록 걸음마 단계이긴 하지만 여성인력 배려와 육성을 위해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04년부터 여직원의 수가 남자 직원보다 많아진 아시아나항공은 ‘모성 보호’를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임신 후 비행이 모체 및 태아에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이 회사의 여성 승무원은 임신을 인지한 시점부터 휴직 신청이 가능하다. 또 생후 1년이 안 된 아기가 있으면 횟수에 제한 없이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1년간 출산한 여직원 중 73%가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웅진그룹은 전체 사무직 직원 7200여 명 중 여성 비율이 70%에 이른다. 여성 비율이 워낙 높다 보니 임신이나 출산으로 인한 여성 차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웅진씽크빅의 이상인 인재개발실장은 “다른 회사보다 유독 사내 커플 비율이 높은 것도, 여직원의 임신과 출산을 함께 축하하는 것도 웅진의 독특한 기업 문화”라고 말했다.
한국BMS제약은 자녀를 낳은 직원에게 1년 동안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 회사의 미국 본사는 ‘워킹 머더’가 발표한 ‘일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최고 회사’ 1위로 선정됐다.
현대자동차는 취학 전 만 5세 이상 자녀가 있는 임직원에게 유아교육비를 지원하며 장애 아동을 둔 직원에게도 언어치료, 행동치료 등 특수교육 비용을 대준다. SK C&C는 모유수유실과 어린이집, 여직원 휴게실을 운영하고 있다.
○ 여성 커뮤니티 만들기
삼성SDS는 여직원들의 고충을 상담해 주는 ‘사이버 멘토링’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 사이트에는 현재 3000여 명의 회원이 일과 가정의 양립, 보육, 남녀 사원 간 갈등, 조직 적응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의논하고 있다.
휠라코리아는 여직원 동호회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다솜회’는 1994년 창립된 휠라코리아 여사원들의 친목모임. 여사원의 권리를 대변하는 이 모임에 회사는 최고 연 1000만 원까지 지원해 준다.
현대백화점에는 여직원들을 위한 사내 학사 제도가 있다. 여직원들이 ‘숭의여자대학 현대백화점 교육원’을 이수하면 졸업할 때 일반 전문대 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준다. 관광학, 어문학, 호텔 실무 등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롯데백화점도 대학 진학의 기회를 갖지 못한 고졸 여자 판매사원을 대상으로 한양여자대학에 ‘위탁사내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여성인력 활용을 막는 장애요인 8가지
요즘 기업들에 인재 확보는 핵심 경영 능력으로 부상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믿을 건 역시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이다.그러나 아직 국내 기업의 여성인력 활용은 선진국의 경쟁기업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해마다 높아지지만 고위 전문직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저하게 낮다. 경영컨설팅 회사 매킨지는 ‘우먼 코리아 보고서’에서 국내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해결해야 할 장애 요인을 크게 8가지로 꼽았다.
먼저 성 역할에 대해 편견을 심는 교육. 초중고교의 교과서에서 여전히 남성은 주요 직책을 맡는 전문 직업인으로, 여성은 보조 인물로 그려진다.
둘째, 특정 분야에 편중된 인력 양성이다. 대학에 진학할 때 인문 사회계와 이공계에 고루 포진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인문 사회계를 주로 선택한다. 특히 기업의 수요가 낮은 분야에 편중돼 졸업 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셋째, 직장 내 성차별적인 인사제도와 관행.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사의 모든 단계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근무 의욕은 떨어지고 근속 기간이 줄어든다. 단순 보조직 혹은 저임금 직종에 집중되기도 한다.
넷째, 미흡한 모성보호 제도와 보육지원 부족. 많은 여성이 육아 문제를 취업의 가장 큰 부담으로 꼽는다. 제도와 시행 측면에서 모두 미흡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 질과 양 측면에서 모자라는 보육지원은 여성의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핵심 장애다.
다섯째, 비탄력적인 근무시간 제도도 장애요인이다. 여성이 육아와 일을 적절하게 조화할 수 있는 시간 활용이 어렵다.
여섯째, 재취업 훈련기관 등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0, 30대 여성이 결혼 후 다시 취업하려 해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어렵다.
일곱째, 여성노동 관계법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성차별을 규제하는 법과 감독기관이 있지만 피해자들은 이의조차 제기하기 힘들다. 이는 법의 강제성이 약하고, 아직도 사회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반인의 의식 부족이다. 여전히 여성인력 활용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미흡하고,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출하면 남성 인력을 대체할 것이라는 ‘제로섬(zero-sum)’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 자신의 의지가 부족한 것도 문제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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