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머(Hummer·미군용 다목적 4WD를 레저용으로 개조)보다는 덜 투박하고 레인지로버(D3의 도시풍 럭셔리형)보다는 좀 더 근육질의 상시 4WD. 기자의 드림 카로 자리 잡은 지 몇 해가 됐건만 아직도 일편단심 그 마음은 바뀔 줄 모르니 그 짝사랑이 병으로 덧날까 두려운 하이엔드 카다.
그런 와중에 D3가 내 차지가 됐다. 비록 잠시지만. 그 D3를 몰고 간 곳, 눈 덮인 오대산의 상원사.
10cm 이상 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나와 D3를 그리로 내몰았다.》
오전 5시, 서울은 우중(雨中). 계기판이 가리키는 바깥 온도는 영상 3도다. 주차장을 나와 들른 곳은 24시간 영업하는 김밥식당. 김밥 두 줄을 사서는 곧바로 88올림픽도로에 진입했다.
D3와의 인연은 묘하다. 그 계기는 아프리카의 사파리 투어였다. 장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크루거 국립공원. 당시 나는 랜드로버의 디펜더(사파리투어에 사용하는 오픈 톱)에 몸을 실었다. 해질 녘 나선 사파리 도중 운좋게도 짝짓기 하는 표범과 조우했다. 두 녀석은 밀회를 즐기기 위해 사반나의 잡목 숲 안으로 들어갔다. 디펜더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이때였다.
디펜더에게 사반나의 잡목은 아무런 장애물이 아니었다. 어른 허벅지 두께에 높이가 3, 4m인 나무를 그냥 밀어 젖힌다. 그런데도 엔진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다. 암사자가 가젤(영양의 한 종류)을 사냥하기 위해 살금살금 기어가듯 디펜더는 소리 없이 표범에게 다가갔다. 숨죽이고 지켜보기를 한 시간. 디펜더는 표범에게 귀찮은 방해꾼이 전혀 아니었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연못에서 물을 마시는 사자 가족 옆을 지나왔다. 사자 역시 마찬가지. 사반나 어디에서고 디펜더의 접근에 놀라거나 그 디펜더를 경계하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디펜더는 이미 사반나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자연을 닮은 랜드로버. 그것은 전 세계 어디서고 같다.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에서도, 타히티 섬(프렌치폴리네시아)의 밀림에서도. ‘사파리’라고 이름 붙은 투어에는 예외 없이 사륜구동 차량으로 랜드로버가 등장한다. 가끔은 35년도 더 된 낡은 랜드로버가 나온다. 그래도 험로 주행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럴 때마다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대답 역시 전 세계가 똑같다. “아니, 아직 멀쩡한데요?”
디펜더가 랜드로버의 ‘동물의 왕국’ 버전이라면 D3는 ‘도심탈출’ 버전이라 할 만하다. 디펜더가 아프리카의 사반나를 종횡무진 누비듯 D3는 도심 밖 산과 들판을 쉼 없이 달린다. D3는 늘 이렇게 다가온다. 하드톱을 씌운 도시형 디펜더로. 물론 그 이상이며 실제도 그렇다. 디펜더에 가까운 것은 D2다. 외관부터가 훨씬 터프하다. 그 위력을 나는 4월 진창으로 변한 강원 평창군 도암면의 바이애슬론 경기장 거친 험로에서 목격했다. 머드타이어를 끼지 않아 진흙탕 언덕에서 계속 미끄러지던 D3 세 대가 구조를 요청했다. 그때 이 세 대를 모두 구해준 것이 D2다. 홀로 언덕을 차고 올라 윈치의 와이어로 D3를 끌어올린 괴력은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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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로버는 이렇듯 자연의 친구다. 자연이란 ‘스스로 자, 그럴 연’이란 글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 랜드로버는 그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체험하고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섬기는 차다. 내가 오대산으로 D3를 몰고 간 것도 같은 이유다. 눈 내리기만을 고대하던 터에 마침 강원 산간에 밤새 눈이 10cm 이상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는 주저 없이 눈 덮인 오대산으로 목표를 정했던 것이다.
우중의 고속도로가 설경을 선사한 것은 원주를 지난 직후. 새말쯤에서 고도가 높아지며 흰 눈에 덮인 산하가 정면에 펼쳐졌다. 그래도 기온은 0도. 진부에 다다르자 비로소 영하 1도로 떨어졌다. 드디어 월정사 입구. 매표소 앞 전나무 터널 길은 이미 설국으로 진입하는 눈길로 변해 있었다. D3의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을 켤 때가 됐다. 네 가지 모드 가운데 가장 왼쪽의 ‘풀 자갈 눈’ 모드로 돌렸다. 엔진과 변속기, 지능형 자동기어조정장치가 유기적으로 반응하면서 미끄럼 사고를 사전에 막아 주는 첨단장치다.
월정사 주차장을 지나 상원사로 오르는 계곡 길. 나뭇가지에 쌓인 눈으로 이뤄진 터널 길을 몇 개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 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줄을 생각나게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설국이 펼쳐졌다’는. 월정사 상원사를 지나 평창군 진부면과 홍천군 내면을 잇는 이 지방도로 446호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길이다. 오대산의 속살을 헤집는 은근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벌써 포장도로로 바뀌었을 길이건만 여러 사람이 반대하여 이렇듯 옛길처럼 보존토록 했다고 전해온다.
천천히 산을 오르며 설경을 감상하는 이른 아침 오대산. 그 끝에서 만나는 상원사의 극락보전은 부처님이 주신 큰 선물이다. 이곳에는 불상이 없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아침 산사는 그 자체가 선경인데 이날은 밤새 눈까지 내려 설국천지를 이뤘으니 그 비경은 말로 글로 눈으로 머리로 담기에도 부족하다. 카메라로는 물론이고.
독경소리 그윽한 눈 덮인 산사의 아침. 배고픈 새들만 분주히 날아다닌다. 젖은 깃털 말리느라 단청 올린 당우의 처마 아래 앉은 작은 산새. 그런데 이 새들이 갑자기 눈밭으로 날아가더니 눈밭에 홀로 서 있는 한 스님의 주변을 반갑듯이 돌며 짹짹거린다. 가만히 보니 나이 드신 비구니스님인데 하늘 향해 손바닥을 펼친 채로 양팔을 벌리고 계신다. 그러자 새들이 손바닥에 앉는다. 그 손바닥에는 쌀이 한 줌 올려져 있었다.
“여기 새들은 이렇게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지요. 사람이 해치지 않으니까요.” 해맑은 웃음이 인상적인 노 스님의 이 말씀. 거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면 이 세상에 무슨 가르침이 더 필요할까. 깊어가는 겨울, 이토록 외진 산사의 눈밭에서 만난 아름다운 장면. 나를 예까지 인도한 D3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런 험한 눈길의 산속을 과연 D3가 없었다면 혼자 올 엄두가 났을까 싶어서다. 이래저래 D3는 자연과 사람을 이어 주는 자연의 친구다.
오대산=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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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찾아가기=영동고속도로∼진부 나들목∼좌회전∼국도 6호선∼4km∼월정사 삼거리(좌회전)∼지방도 446호선∼매표소∼월정사 주차장∼8.3km∼상원사
▽알아 두기=지방도 446호선은 비포장도로. 겨울과 봄에는 상원사까지만 차량 운행이 가능.
▽요금=입장료 3400원, 주차비 4000원
▽사찰 역사=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 석가모니의 정골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이 있다.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당시 것으로 국내 동종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절 마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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