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달러 시대 일찍 왔는데, 2만달러 시대 같지 않구나

  • 입력 2007년 1월 6일 03시 02분


“지난 대선 때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내걸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환율의 함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민은 간단한 걸 좋아하고 쉽게 감(感)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에) 2만 달러를 비전으로 제시하게 됐다. 연간 5% 성장하면 2015년이면 2만 달러에 도달할 수 있지만 환율에 따라서는 2011년에도 가능할 수 있다.”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대전청사 공무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뒤이자 현 정부 임기가 사실상 끝나는 해인 올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새해 10대 트렌드 중 첫 번째로 ‘1인당 2만 달러 시대’를 꼽았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경제 성장에 힘입었다기보다는 원화 환율 하락(원화 가치 상승)이 기여한 대목이 결정적이다. ‘2만 달러 시대’는 반가운 일이지만 경기 침체와 취업난으로 국민의 원화 기준 실질소득이 별로 늘지 않는 상황이어서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 저성장 속에 다가온 2만 달러 시대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구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민관(民官) 합동의 ‘국민소득 2만 달러 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부터다. 노 당선자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만 했다.

2만 달러가 현 정부의 공식 슬로건이 된 것은 이로부터 4개월 뒤. 그해 6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노 대통령은 “국가 전체를 개조해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며 ‘국민소득 2만 달러’를 공식 슬로건으로 처음 내걸었다.

이어 노 대통령은 한 달 뒤 정부대전청사 공무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돈을 국가 비전으로 내세우기가 좀 그래서 대선 때도 2만 달러 시대를 공약으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예를 들어 (1995년) 달러당 800원 시대에 한국이 1만 달러를 넘었는데 사실 그 시기에는 수출이 내리 3년간 적자를 보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높은 원화 가치를 통해 억지로 1만 달러를 만든 뒤에 (외환위기로) 금방 본전을 드러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환율 덕에 국민소득이 올라갔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4년 만에 현실화됐다. 현 정부 임기 5년 중 정부가 5%로 추정하는 지난해를 제외하고 나머지 4년은 3∼4%대(올해는 4.5% 전망)의 저성장이 반복됐고 실질소득 증가율은 더 낮았지만 2만 달러 시대는 예상보다 훨씬 앞서 다가왔다.

○ 홍콩-싱가포르는 경제성장으로 돌파

환율 하락은 국민소득 증가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LG경제연구원은 올해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달러당 910원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고 이를 근거로 올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현 정부가 ‘2만 달러 시대’를 외치기 시작한 2003년의 평균 원-달러 환율은 1192원. 당시 환율이 지금도 그대로라면 올해 1인당 국민소득은 1만5000∼1만5500달러 수준에 그친다는 계산이 나온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국민소득에 대한 환율의 기여도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한국의 국민소득은 83.8% 증가했지만 이 중 환율(30.5%포인트), 물가(15.3%포인트)를 뺀 실질소득 기여분은 38%포인트에 불과하다. 늘어난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이 환율과 물가 덕분이라는 뜻이다.

물론 선진국 중에서도 자국 통화의 강세가 달러 기준 국민소득을 급속히 늘어나게 한 중요한 변수인 사례가 있다.

이탈리아는 리라화(貨) 가치 상승에 힘입어 2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불과 5년 만에 1만 달러 국가에서 2만 달러 국가로 탈바꿈한 이탈리아는 이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2.6%에 그쳤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달러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1981년 1만 달러를 달성한 지 6년 만인 1987년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돌파했다. 홍콩 싱가포르 등은 한국과 더 차이가 있다. 싱가포르는 1만 달러 달성 이후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에 육박했고 홍콩도 환율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가운데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했다. 영국 네덜란드도 강력한 정치 리더십과 경제 개혁, 노사관계 개선 등으로 2만 달러를 달성했다.

○ 내실 갖추려면 성장잠재력 높여야

‘환율 착시(錯視)’에 힘입어 어부지리로 2만 달러 시대를 맞은 한국의 현재 모습은 그리 밝지 않다. 물론 환율 하락으로 인한 달러 기준 국민소득 증가도 국가 신인도를 높이고 국민의 해외 구매력을 키우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 약화와 소득 양극화로 실제 개인소득이 2만 달러 수준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노사관계 경쟁력은 최하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근로자의 시간당 노동생산성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40%를 밑돈다.

나성린(경제학) 한양대 교수는 “내수와 설비투자가 살아나지 않고 산업구조도 선진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2만 달러 시대’는 한국의 경제력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선진국 사례를 보면 2만 달러를 돌파한 뒤 1만 달러로 다시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경제 성장세는 대체로 둔화된다”며 “내실 있게 국민소득을 높이려면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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