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직무급제 도입, 인건비 부담 해소할 유일한 카드”

  • 입력 2007년 1월 17일 02시 58분


우리은행 황영기 행장(오른쪽)과 마호웅 노조위원장이 지난해 12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우리은행 황영기 행장(오른쪽)과 마호웅 노조위원장이 지난해 12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운전사, 청원경찰 평균 연봉 각각 6700만 원, 6300만 원, 운전사 최고 연봉은 9100만 원.”

감사원이 한국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4개 국책 금융기관에 대해 감사를 벌여 지난해 9월 이 같은 결과를 발표하자 많은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임직원 가운데 상대적으로 단순한 업무를 맡은 이들이 이처럼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직무와 관계없이 직원들의 임금수준을 비슷하게 맞췄기 때문이었다.

민간기업들도 이런 상황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동안 비정규직 채용으로 단일 호봉제 문제를 피해 왔지만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보호법안 때문에 올해 7월부터는 2년 이상 고용한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들을 기존 정규직과 같이 대우하면 인건비 부담은 감당할 수 없이 커진다. 해고도 어려워져 고용 유연성은 급속히 하락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직무급제 도입을 유일한 돌파구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기업들, 직무급제 전환 준비 잰걸음

“직무급제는 임기 안에 못하면 ‘유언’으로라도 남기고 가야 할 인사제도의 미래다.”

황영기 우리은행장은 지난해 말 3100여 명의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노조와 합의한 뒤 이렇게 말했다.

황 행장은 “정규직은 단일 호봉제였지만 ‘매스마케팅(창구 직원)’ 직군(職群)이 정규직에 포함돼 호봉 테이블을 새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고용의 안전성을 높여 주는 대신 별도의 임금 시스템을 도입해 급여의 차이는 유지한다는 것이다.

임금 시스템의 수술이 급해진 곳은 비정규직 비중이 큰 금융회사와 유통업체들. ‘방만 경영’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른 공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앞 다퉈 컨설팅업체 등에 직무급제 도입 방안을 문의하고 있다.

박준성(경영학) 성신여대 교수는 “많은 회사가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노사 간 협의를 시작했다”면서 “호텔, 백화점 등 비정규직이 많은 서비스업체들을 중심으로 컨설팅 의뢰가 많다”고 말했다.

CJ, 태평양 등 대기업들은 일부 계열사에서 시험 가동하던 직무급제를 전체 계열사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 아직은 불완전한 직무급제 도입

전문가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성과급제 도입 등을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한 움직임을 한국의 ‘1차 임금혁명’이라고 부른다. 이후 기업들은 기존 호봉제를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하고 ‘호봉제+성과급제’의 어중간한 임금 시스템을 유지해 왔다.

한계를 느낀 일부 기업은 2002년경부터 직무급제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조의 강한 반발 등에 부닥쳐 부분적인 도입에 그쳤다.

지난해 공기업 중 처음으로 직무급제 도입을 결정한 KOTRA는 일단 일부 직원에 한해 직무급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다른 직원이 대체할 수 없는 24개 전문 직무를 공모(公募)하고 선발된 직원들에게만 연 500만∼1000만 원의 직무급을 주는 제도다.

KOTRA 인사팀 안성준 과장은 “해당 직무와 임금 결정과정에 어려움이 많아 전면 도입보다는 순차 도입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 본격화되는 ‘2차 임금혁명’

비정규직 보호법안 통과의 여파로 최근 직무급제 확산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한국 기업들은 ‘2차 임금혁명’을 맞고 있다. 직무급제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한국의 임금체계는 ‘직무급+성과급제’인 선진국 형태에 바짝 다가설 것으로 예상된다.

직무급제 임금혁명의 여파는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 직원 외에 기존 정규직 직원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직무급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 높은 임금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고령(高齡) 직원들의 처우도 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 많은 직원들의 불만이 있겠지만 회사로서는 임금 부담이 큰 고령직원들의 근무에 따른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경력과 경험이 풍부한 직원들에게 더 오래 일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임직원들의 정서적 반발이 걸림돌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부양, 자녀의 교육비와 결혼비용 목돈이 들어갈 일이 많아진다. 연차가 오를수록 임금이 많아지는 호봉제는 이런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진 제도였다.

김동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일부 기업의 직무급 도입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연령 증가에 따른 생활비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부 충격에 따라 불가피해진 직무급제의 본격 도입은 이런 한국인의 삶을 크게 바꿔 놓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만큼 직원과 노조의 강한 저항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특정 업무에 직원을 장기간 배치해 전문성을 키우는 대신 회사의 필요에 따라 직원들을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한국 기업들의 인사 시스템도 문제로 지적된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3월 정규직 전환 앞둔 우리은행

올해 3월 비정규직 3100여 명의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은행의 직무급제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2005년 이전까지 우리은행의 임금체계는 전통적인 단일 호봉제였다. 어떤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행원들의 임금은 오직 호봉에 따라 결정됐다. 성과급 제도가 있긴 했지만 임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은행은 2005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개인영업, 기업영업, 투자금융, 경영지원, 매스마케팅직, 고객만족, 사무지원 등 7개 직군으로 인력을 세분화했다. 이 중 매스마케팅, 고객만족, 사무지원 등 3개는 정규직 전환이 예정돼 있는 비정규직 직군이다.

현재 우리은행은 이 7개 직군별로 성과급의 변동 폭을 다르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A직군에 속해 있으면 최대 연봉의 100%를 성과급으로 받지만 B직군에 있으면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연봉의 50%밖에 못 받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은행이 준비 중인 임금제도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다. 앞으로는 성과급뿐 아니라 기본급도 직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입 행원이 받는 초봉은 물론이고 총연봉에서 기본급이 차지하는 비중도 7개 직군별로 차이가 생긴다.

가령 직무 성과가 은행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는 투자금융 직군의 경우 기본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대신 연말에 받을 수 있는 성과급 한도는 훨씬 더 높게 책정한다.

또 지금까지 성과급은 그해에 받는 것으로 끝났지만 새로운 임금제도에서는 성과급이 다음 해 기본급 인상에 반영된다. 물론 그 인상 폭은 직군에 따라 각기 다르게 설계할 계획. 기존의 호봉 테이블이 완전히 무너지는 셈이다.

직군별 구체적인 기본급의 액수나 성과급의 비율 등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우리은행 측은 “노조와 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방안은 아니다”라며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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