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이 내린 자리 ‘개혁 불모지’로

  • 입력 2007년 1월 24일 02시 58분


《“저는 독서실에서 시험 준비 중인 사람입니다. 제 옆 자리에는 한 달 넘게 자리를 잡고 공부하시는 분이 있는데 진급시험을 준비하는 공기업 직원이랍니다. 알고 보니 다니는 회사에서 아예 몇 달 공부하라고 규정에도 없는 휴가를 줬다고 합니다. 일반 기업 같으면 생각도 못할 엄청난 도덕적 해이 아닐까요….” 23일 본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을 통해 공기업 등 일부 공공기관이 이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휴가 위로금 등 각종 후생복지를 남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자신을 구직자라고 밝힌 K 씨는 이날 기자에게 이런 e메일을 보냈다. 그는 “공기업 다닌다고 월급까지 받아 가며 몇 달씩 ‘독서실 출장공부’를 하면 세금 내는 어느 국민이 동의하겠느냐”며 “같이 독서실 쓰면서 속이 뒤집어진다”고 말했다.

▽본보 23일자 A4면 참조▽

▶ “국민세금 물쓰듯…” 최하평가 직원에 330% 성과급

공공기관들의 방만 경영이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현 정부도 공공기관 개혁을 내세워 수차례 감사와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감사원은 2005년 10월부터 2년에 걸쳐 공기업 감사를 진행 중이고, 국무총리실도 지난해 11월 말부터 대한주택공사 등 대형 공공기관 25곳의 예산집행 실태 등을 조사하고 있지만 공공기관은 여전히 ‘개혁 무풍지대(無風地帶)’라는 관측이 많다.

전문가들은 전시행정에 그치는 일회성 조사 대신 공공기관의 인사 및 관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방만 경영 부르는 낙하산 인사

공기업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정부 여당이 논공행상 식으로 진행하는 공공기관 기관장 및 감사에 대한 ‘낙하산 인사’를 지양(止揚)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별다른 전문지식과 경험도 없이 기관의 수장이나 감사로 부임하면 업무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내부 직원들에게서도 조직 운영에 필요한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워 결과적으로 조직의 기득권 등 관성을 깨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공공기관장은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각종 이해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정부 부처장과는 달리 공공기관은 조율 능력보다는 실질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임기 초반 애를 많이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낙하산 인사가 해당 기관의 경영실적에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는 점은 이미 어느 정도 입증됐다.

이명석(행정학) 성균관대 교수 연구팀이 산업은행 등 18개 공공기관의 최근 수년간 경영실적 평점을 분석한 결과 외부 전문가나 내부 인사가 기관장을 맡았을 때보다 정치권 낙하산 인사가 기관장으로 일했을 때 점수가 더 나빴다.

100점 만점 기준으로 전문가 등이 기관장을 맡았을 때는 경영실적 평점이 92.20점이었지만 낙하산 기관의 평점은 90.42점에 그쳤다. 종합 경영, 주요 사업, 관리 효율, 경영 관리 등 전 항목에서 전문가가 수장인 기관의 경영실적이 더 좋았다.

이 교수는 “이런 평가는 결국 공공기관장에 대한 정치적 임용이 계속되는 한 경영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물론 외국 공공기관에도 낙하산 인사는 있다. 미국에도 ‘회전문(revolving door) 인사’가 있고, 일본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의 ‘아마쿠다리(天下り)’라는 표현이 일반화돼 있다. 프랑스에서도 낙하산 인사란 의미의 ‘파라쉬타주(parachutage)’가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낙하산 인사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보다 덜하다.

이재은(행정학) 충북대 교수는 “프랑스의 경우 정부가 무능력하고 역량이 없는 사람을 추천하면 해당 기관의 이사회가 승인하지 않을 실질적 권한이 있다”고 말했다.

○ 조직 장악-개혁 실패로 기득권 고착

이러한 인사 환경은 필연적으로 낙하산 기관장과 감사의 조직 장악 실패로 이어지고 노조와의 협상 과정에서도 힘을 얻지 못한다.

23일 이사회 속기록으로 드러난 공공기관의 방만 경영 사례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 적지 않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해 8월 이사회에서 창립기념일 대체휴가 1일, 사회봉사의 날 대체휴가 1일, 태아검진 휴가 8시간을 도입하려던 것도 2003년 노사 단체협약 사항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게 논거였다.

자신을 낙하산 인사라고 인정한 한 공공기관의 감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조직의 체질을 바꾸려면 사실상 노조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 이는 대단히 힘겨운 싸움”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실제로 기관에 와 보니 민간에서는 찾기 어려운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점의 상당수가 노조와의 약속이거나 단협 사항이라 낙하산 인사가 어떻게 바꾸거나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털어놨다.

많은 공공기관이 해당 분야에서 사실상 독과점 업체라서 내부 구조조정과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강화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것도 방만 경영에 한몫하고 있다.

이재은 교수 연구팀이 2005년 공기업 인사 담당 직원 225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정부가 기관장을 인선할 때 고려할 사항 중 ‘업무 수행의 전문성’(44.4%)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혔다.

낙하산 인사가 상대적으로 강점을 보이는 ‘대외 협상능력과 네트워킹 역량’(24.0%), ‘정부정책의 방향에 대한 이해’(7.1%)는 중요도가 낮은 항목으로 분류됐다.

결국 공공기관 직원들도 전문가 출신 기관장 등이 내부 개혁 및 기관 혁신을 그나마 제대로 추진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박천오(행정학) 명지대 교수는 “민간 기업과는 달리 공공기관은 변화의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는 만큼 당장 낙하산 인사 관행을 폐지하겠다는 허황된 계획보다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공공기관의 인선 과정을 개혁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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