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들이 분단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기업들이다. 이들은 송상(松商) 도제 생활 때 익힌 무차입, 신뢰, 한 우물 경영철학을 토대로 우량기업을 키워냈다. 지금은 2세들이 내실경영으로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거래업체에 100% 현금 결제하라”
사무기기 제조업체인 신도리코는 지난해 주식시장에서 인수합병(M&A) 논란에 휘말렸다. 신도리코의 우량한 재무구조를 주목한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일명 장하성펀드)가 경영 참여를 선언하며 신도리코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것. 신도리코는 주주총회를 앞둔 지난달 초 장하성펀드와 지배구조개선 합의를 발표한 뒤 M&A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신도리코는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하다. 바꿔 말해 회사 빚이 없다는 얘기다. 되레 은행예금만으로 연간 100억 원이 넘는 이자를 챙길 정도다.
2002년 작고한 우상기 창업주는 “거래업체에 100% 현금결제를 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우 창업주의 장남인 우석형(52) 현 회장도 신규투자 때 자체 보유한 자금을 이용한다는 원칙을 경영의 한 축으로 삼고 있다.
에이스침대 태평양 한국화장품 등도 차입금 의존도가 0%인 알짜 기업들이다.
○ 티슈 한 장도 잘라 쓰고 구두 3년 넘게 신어
1995년 작고한 한일시멘트 허채경 창업주는 내실과 신용이라는 개성상인 특유의 경영방침에 인간 중심의 경영철학을 더했다. 기업에서 최고 자산은 바로 사람이기에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철학은 기업의 이윤을 사회로 되돌리게 했다. 역시 송상 출신인 단사천(2001년 작고) 한국제지 창업주는 해성학원을 세웠고 단재완 현 회장도 교육사업에 남다른 열의를 보이고 있다.
개성상인 출신 기업인 2세들도 사회 공헌 활동에는 활발하지만 정작 본인한테는 씀씀이가 인색한 편이다.
한일시멘트 허 창업주의 차남인 녹십자 허영섭(66) 회장은 지금도 티슈 한 장을 반으로 잘라 쓰고 있다. 허 창업주의 장손으로 3세 경영에 나선 허기호(41) 한일시멘트 사장은 3년 넘게 같은 구두를 신고 있다. 회사 근처 구두수선가게에서 허 사장의 구두를 알아볼 정도다.
○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충고도
개성상인 출신 기업인 2세들은 대부분 은둔형 경영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실향민 출신 기업인 모임을 만들었던 선대와 달리 경영인 친목모임이나 언론에 나서는 것을 꺼린다.
다만 이수영(65) 동양제철화학 회장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직을 맡는 등 대외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동양제철화학은 개성에서 태어나 송상 도제 생활을 거친 이회림(90) 명예회장이 세운 기업이다.
개성상인 출신 기업인 2세들의 소극적인 경영 스타일에 대해 재계 한 관계자는 ‘두드려 본 돌다리도 함부로 건너지 않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이들 기업은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도 새로운 사업보다는 금융 투자를 선호한다. 이 때문에 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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