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끼리 과열경쟁 그만! 통합쇼핑몰로 상생합시다”

  • 입력 2007년 3월 6일 02시 59분


“여자가 왜?” 면접관들이 그 말을 목구멍까지 끌어올렸다가 다시 주워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1999년 가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내부 창업심사 면접장에서였다. 당시 ETRI 연구원이었던 한미숙(사진) 헤리트 사장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면접관들은 5명의 지원자 가운데 4명의 남성 지원자에게는 사업성에 관해 물었다. 하지만 한 사장에게는 다른 질문을 했다. “왜 좋은 직장을 관두고 사업을 하겠다는 겁니까?” 생략된 질문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여자가 좋은 직장 잡았으면 맘 잡고 계속 다니지 힘들게 사업은 왜 하려는 겁니까?’

○핸디캡이 나의 채찍

한 사장이 통신서비스 업체 헤리트를 창업한 건 2000년 1월. 올해로 사업을 시작한 지 8년째가 됐다. 그는 살아남았고, 지난달에는 제3대 이노비즈협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노비즈협회장은 중소기업청의 ‘이노비즈 인증’을 받은 3000여 기술 혁신형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자리다.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여성에 지방대 출신. 두 가지 핸디캡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그가 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한밭대 전산학과에 진학했다. 실수 탓이었다. 입시를 앞두고 막판 눈치작전을 벌이던 마지막 날, 지원하려던 청주사대 앞에서 버스에 입학원서를 두고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지방대 전산학과 출신 여학생에게 주어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때 기회가 왔다. 평소 성실히 공부했던 한 사장을 좋게 본 지도교수가 ETRI의 계약직 사원 자리에 추천해 준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의 석·박사 연구원이 가득한 ETRI에서 그가 할 일은 잔심부름이 전부였다.

“책장도 정리하고, 복사도 할 테니 일거리를 주세요. 저도 전산 전공입니다.” 그는 컴퓨터 자판에 익숙지 않았던 상사의 타자 심부름을 대신해 주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렇게 얻은 일감을 밤새워 붙들고 연구했다. 외국 컴퓨터 프로그램 연구 자료였다. 이 자료를 분석해 내자 비로소 연구원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한 사장은 “지방대 출신에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밤을 새워 일하게 만드는 채찍이 됐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뭉쳐야 산다

기업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보호에 기대면 약해지게 마련이다. 실력 하나로 버텨온 한 사장의 경영철학이다. 하지만 사장이 아닌 협회장으로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대기업이 중소기업끼리 싸우게 만드는 탓에 늘 숨이 차오르게 뛰어야 한다”며 “이를 바꾸려면 중소기업이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한 사장은 협회장이 된 뒤 첫 사업으로 기업 간 거래(B2B) 쇼핑몰인 ‘이노비즈몰’을 만들었다. 이노비즈몰에서는 회원사들이 LG전자, KTF, 한국전력, 방위사업청, ETRI 등의 고객사에 공개된 조건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과열경쟁이 줄어든다.

그는 “협회장 임기 동안 이노비즈몰처럼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서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경영 사례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