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층 진입신고? 그랜저를 타는 사람들

  • 입력 2007년 3월 6일 17시 12분


대형승용차 시장에 신형 그랜저(‘그랜저 TG’) 폭풍이 불고 있다.

2005년 5월 출시된 그랜저 TG의 19개월간 판매량은 무려 14만1083대. 이는 이전 모델이었던 그랜저 XG의 7년 간 총 판매량(30만대)의 절반에 가깝다. 2005년 12월과 2006년 1월에는 국내 모든 승용차 브랜드 중 1개월 판매량 기준으로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국내 대형승용차 판매기록으로는 전무한 실적.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진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TG가 국내 대형승용차의 잠재 수요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이젠 대형승용차로써의 개체 존엄성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그랜저가 ‘부자의 차’로 자리매김한 것은 1986년 국내 최초의 대형승용차로 탄생한 일명 ‘각(角) 그랜저’ 시판 때부터다. 이후 땅 투기로 큰돈을 번 졸부들과 조폭이 ‘각 그랜저’를 타고 다니면서 그랜저의 이미지는 사장, 보스, 졸부, 조폭의 차로 굳어졌다.

1992년 ‘뉴그랜저’를 거쳐 1998년에 출시된 그랜저 XG는 ‘다이너스티’와 ‘에쿠스’에 치여 ‘부자와 상류층의 차’의 라는 이미지를 위협받게 된다. 직선도 유선형도 아닌 어정쩡한 그랜저 XG는 디자인을 중시하는 감각적 상류층에게 외면당했다. 그들은 그랜저 XG 대신 비슷한 가격에 크고 실용적인 레저용 차량(RV)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디젤 값은 휘발유의 절반이었다.

이런 트렌드에 위기의식을 느낀 현대차는 마침내 XG보다 차체가 크고 최저 배기량과 최고 배기량을 파격적으로 올린 새로운 개념의 그랜저(TG)를 내놓았다. 차의 길이와 넓이 높이 모두 이전보다 몇 cm씩 늘었다. 오너드라이버도 만족시키면서 대형 승용차의 품위도 지켜낸다는 콘셉트.

2005년 5월 그랜저 TG를 출고하면서 현대차는 19년 전의 브랜드명인 ‘그랜저’를 부활시켰다. 사실 ‘그랜저 TG’는 제품 프로젝트명이고 실제 브랜드명은 그냥 ‘그랜저’다. 현대차는 신형 그랜저에 ‘럭셔리’ ‘프리미엄’ 같은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며 모델별로 다른 마케팅 방식을 적용한다. ‘주적(主敵)’ 렉서스 ‘ES350’을 비롯한 수입차 대응용 광고의 카피는 아예 대놓고 ‘한번 붙어보자’며 싸움을 건다. “수입차를 타보신 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이 누리고 싶은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지난해 TG를 구입한 8만4861명 중 L330(배기량 3300cc) 이상의 모델을 산 사람은 1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Q270(배기량 2700cc) 모델을 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Q270 모델에 열광하는가. 답은 한 가지다. Q270 모델은 상류층의 자부심과 ‘386’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3040 세대’의 감성적 이미지를 함께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비록 상류층은 아니지만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마치 상류층이 된 듯한 자부심을 심어주면서 그들의 꿈꿔온 자동차 성능에 대한 욕구와 감성적 이미지를 제대로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차의 Q270 광고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서로 모른 채 할 수밖에 없는 40대 옛 연인의 우연한 조우를 품격 있게 표현한 이 광고는 홍콩 배우 여명과 서기가 출연한 영화 ‘유리의 성’을 떠올린다. 광고와 영화의 배경음악은 1960년대 히트 팝송인 ‘트라이 투 리멤버(Try To Remember)’. 영화에서 그들은 젊은 시절에는 정의와 양심을 위해 싸웠고, 이후 사회에 나와서는 전문직 종사자가 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묘사됐다.

이 광고에서 현대차는 그랜저의 옛 영광을 끊임없이 ‘리멤버’시키려 ‘트라이’ 하면서 386세대의 특징인 자유분방한 연애를 통해 신형 그랜저의 트렌디한 콘셉트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현대차의 이런 시도는 100% 성공한다. 신형 그랜저의 이미지는 더 이상 ‘상류층 부자의 차’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와 상류층 진입을 앞둔 중산층의 차’로 변해 있었다.

한편 그랜저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대중적 명품, 즉 ‘매스티지(mass prestige)’로 자리잡고 있다. 이른바 ‘그랜저 타는 거지’로 불리는 이들은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그랜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은다. 그들의 ‘재산목록 1호’는 그랜저다.

현대차 기획실의 박진영 차장은 “이제 그랜저가 신분의 상징이던 시대는 가고, 명차를 소유했다는 자부심과 차의 성능, 디자인으로 평가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라고 설명했다.

※ 자세한 내용은 시중에 배포 중인 ‘신동아’ 3월호를 참조하세요.

최영철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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