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오토바이 경기복을 만드는 노하우를 축적했고 결국 유럽 시장에서 40%, 일본 시장에서 80%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했다. 이 분야에서 세계에 경쟁할 기업이 없다.
한일의 박은용 사장은 “100%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최근 진출한 미국 시장은 유럽과 더불어 세계 최대 시장이지만 이제 겨우 10% 남짓한 점유율을 올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중앙회는 3일 박 사장을 ‘3월의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으로 선정했다.
모터사이클 경기복 가격은 한 벌에 100만 원이 넘는다. 단순한 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복은 두껍고 질긴 소가죽을 튼튼하게 바느질해 이은 뒤 사지(四肢)의 관절과 등 부위에 강화플라스틱으로 된 보호대를 집어넣어 만든다. 제조사들은 0.1초를 다투는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이 모든 과정에서 단 몇 g의 무게라도 줄이려고 애를 쓴다.
현재 세계 여러 나라 업체들이 오토바이 경기복을 만들고 있다. 일부 경쟁업체들이 만드는 경기복 가격은 한일 제품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고객들은 한일의 제품을 선택한다. 기술 수준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 경기복 시장에서는 한일과 경쟁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
이탈리아의 알피네스타, 미국의 조로킷, 일본의 난카이(南海) 등 각국 최고의 브랜드가 한일의 경기복을 주문받아 자신들의 상표를 붙여 판매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기업들이 이 분야 선두였지만 지금 일본 시장은 한때 일본 업체의 하청업체였던 한일의 것이 됐다. 유럽에서도 한일의 명성이 높아졌다.
봉제산업은 한국에서 사양산업이 됐다지만 한일은 고집스럽게 봉제산업에 계속 매달렸고 매년 꾸준하게 이익을 내고 있다. 지난해 이 회사는 매출 255억 원, 순이익 15억 원의 실적을 올렸다.
가장 큰 비결은 30년 이상 경기복을 만들어 온 한일의 ‘숙련공’이었다. 대전 한일 본사의 생산직 근로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15년이 넘는다.
영업담당 홍순영 이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1982년 19세로 입사해 독학으로 재단을 배웠다.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자 직접 입어보면서 경기복을 만들었다.
당시 오토바이 경기복은 옆구리에 동그라미 모양의 구멍을 여러 개 만드는 식으로 디자인했다. 환풍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홍 이사는 별(☆), 동그라미(○) 등 여러 가지 모양의 구멍을 직접 뚫어가며 가죽옷을 입은 채 오토바이로 도로를 달렸다. 여름날 햇살이 따가운 거리에서 가장 시원하게 느껴지는 모양의 구멍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한일식 연구개발(R&D)이었다.
○ 기술은 대를 이어
또 한일의 근로자들은 대를 물려가며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한다.
이들이 자랑하는 기술 가운데 ‘스카이빙’ 기술이 있다. 스카이빙이란 가죽을 얇게 깎아내는 기술을 말한다. 한일은 가죽과 가죽을 이어붙일 때 이 기술을 사용한다. 한때 고객사였던 일본 업체로부터 배운 기술이다.
경기복의 이음매 부분은 여러 겹으로 가죽이 접히기 때문에 두께가 두껍다. 가죽 한 장의 두께는 3∼4mm 정도. 4겹만 겹쳐도 1cm 이상 된다. 한일은 이 이음매를 스카이빙으로 얇게 깎아 착용감을 개선하고 공기 저항을 줄였다. 한일의 스카이빙은 4겹이 겹치는 이음매의 두께도 5mm 이하로 유지한다.
기술을 가르쳐 준 것은 일본 회사였지만 완성은 한일에서 이뤄졌다. 선배의 기술을 후배가 개선시키는 노하우가 ‘제값 받는 제품’의 비결이었다. 최근 한일은 중국 웨이펑(威鵬)에서 합작공장을 운영한다. 합작공장의 품질은 아직 대전 본사를 따라오지 못한다. 하지만 현지 합작공장 제품도 경쟁업체와 비교하면 월등히 뛰어나다. 이 또한 기술 전수 덕분이다.
○ 무재고 생산관리와 신뢰
‘무재고 생산관리’도 이 회사의 자랑이다.
한일의 창고에는 경기복 재고가 전혀 없다. 창고에는 오직 원자재만 보관된다. 그나마 원자재도 가격 상승이 예상될 때에만 미리 구입한다. 원자재 가격이 안정적일 때에는 바이어의 주문을 받은 뒤에야 원자재를 구입한다.
이렇게 원자재 주문부터 제품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4개월. 주문을 받고 원자재를 구입하는 시간만 2개월이니 생산 및 출하에는 2개월도 안 걸린다. 경쟁업체들은 보통 5, 6개월이 걸린다.
한일은 심지어 납기가 늦어지면 주문받은 제품을 비행기로 실어 보낸다. 운송비보다 바이어와의 신뢰가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공장 관리를 담당하는 김진형 총무부장은 “운송비를 줄이려다 재고가 생겼을 땐 저가로 제품을 팔아야 한다”며 “무재고 생산관리 및 바이어와의 신뢰가 제값을 받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대전=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16인의 고참’그들이 있었기에…▼
평균연령 54.5세. 평균 근속기간 20년 9개월.
이들은 1980년대 한일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이 회사의 ‘고참 16인’이다. 대전 중구 용두동의 작은 공장은 이들 16명의 손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모두 ‘올라운드 플레이어(포지션이 정해지지 않은 전방위 선수)’였다. 정해진 분야가 없이 재단도 하고 영업도 하고 배달도 했다. 홍순영 이사는 독학으로 재단을 배운 기술직이었지만 독학으로 영어와 일본어를 깨친 뒤 영업담당 이사가 됐다.
윤복하, 고태룡, 이병환 고문은 이미 정년퇴직을 했지만 여전히 아침이면 회사로 출근해 공장 문을 두드린다. 이들은 젊음을 바친 회사를 힘이 닿는 한 조금이라도 더 돕겠다며 재고 관리, 기술 자문 등을 맡았다. 회사는 이젠 더 이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한다. 그저 소정의 ‘사례’를 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출근을 멈추지 않는다.
한일의 평균 근속연한은 10년 이상. 생산직은 더 길어서 무려 15년에 이른다. 직원 수 67명의 이 회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인력 구조조정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됐다.
무재고 생산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야근도 잦고, 생산 독촉도 빈번하다. 고참 16인을 중심으로 한 팀워크는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힘이다.
김병국 고문은 이런 시스템의 윤활유다. 그는 관리자가 된 이후 집에서 저녁을 먹은 날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라고 말한다. 밤마다 직원 한 명이라도 더 만나며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공장 식구는 가족보다 가깝다.
박은용 사장은 “혹독한 한일의 생산관리를 지탱하는 것은 고참 16인을 중심으로 한 이런 가족적인 관계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대전=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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