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타결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한국 협상단 중 가장 부각된 두 사람을 꼽으라면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다. 물론 이들의 공로는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협상 전면에 나선 두 사람 뒤에는 밤잠을 설치며 협상의 실무를 챙겨온 수백 명 협상단 관계자들의 땀도 숨겨져 있다.
최대 270여 명까지 늘어났던 한국 측 협상단은 지난달 말부터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막바지 협상에서는 70여 명으로 압축됐다.
17개 분과, 2개 작업반에서 일한 협상단 관계자들은 변호사 등 민간인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 공무원이었다. 근무 부처도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농림부 정보통신부 문화관광부 환경부 등 10여 곳으로 다양했다.
○ 막바지까지 피 말린 핵심 쟁점 분야 책임자들
협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한미 FTA의 핵심 쟁점은 농업 자동차 섬유 금융 등 4대 쟁점으로 압축됐다. 이 때문에 이재훈 산자부 차관, 민동석 농림부 농업통상정책관, 김성진 재경부 국제업무정책관 등이 ‘최종 해결사’로 투입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자칫 협상 자체를 깰 수도 있는 민감 분야를 다루는 실무 책임자들은 하나라도 더 얻고, 덜 양보하기 위해 밤새워 협상을 벌여야 했다.
“이럴 때 한국 사람들은 한국말로 ‘배 째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통역을 통해 이 말을 들은 미국 측 협상 관계자들이 어이가 없는지 그냥 웃더라고요.”
한국 협상단의 농업 분과장을 맡았던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은 협상 타결을 하루 남기고 협상장에서 오갔던 대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 측으로서는 농업 분야에서 더는 ‘내 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라도 양보해 달라는 미국 측 요구에 대한 배 국장의 반응이었다.
배 국장은 한국에서 열렸던 8차 협상 기간 중 중 미국 측 협상단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의 영문 번역본을 보내 화제를 모았다.
자동차 작업반장을 맡았던 김용래 산자부 자동차조선팀장은 “협상 타결을 하루 앞두고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 ‘미래형 자동차’의 한국 측 관세를 10년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데 대해 미국 측 양보를 얻어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한다.
한국 자동차 업체들이 하이브리드차를 본격 양산하려면 2015년은 돼야 한다. 이 기간에 미국에서 생산된 하이브리드차가 쏟아져 들어오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게 자동차 업계의 시각이다.
○ 힘겨루기와 인간적 갈등
“협상 타결을 코앞에 둔 2일 아침 8시 직원들에게 빵을 사다 주려고 편의점에 다녀오는데 호텔 공항버스 주차장에 클레이 로어리 미 재무부 차관보가 짐을 들고 서 있는 겁니다. 마지막 핵심 쟁점이던 ‘금융 일시 세이프가드’를 양보한다는 미국 측 의사를 확인 못했는데 말이죠. 앞을 막고 ‘이대로는 못 간다. 확답을 해 달라’고 버텼죠.” 금융분과 부문장을 신제윤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의 얘기다.
잠시 당황하던 로어리 차관보는 결국 웃으며 신 심의관에게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 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실무진에게 세이프가드를 양보하도록 지침을 두고 떠난 것이다.
금융 일시 세이프가드는 한국에서 자본이 급속히 빠져나가는 것을 긴급히 막을 수 있는 조치로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으로서는 간절한 사안이었다.
신 심의관은 “협상 실무 책임자로서 미국 측의 양보를 최대한 얻어내 한국 금융시장을 지켜내는 것이 과제지만 동시에 한국 금융 산업의 중장기적 발전을 위해 개방의 폭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 사실 갈등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섬유 분과를 맡았던 산자부 황규연 섬유생활팀장은 “이번 협상을 준비하느라 지난달 21일 아버지 생신 때 찾아뵙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이처럼 협상단 관계자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인간적 의무’와 공인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황 팀장은 아버지 생신뿐 아니라 막바지 협상 중 가장 절친한 친구의 부친 상가도 찾지 못했다. 그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농업과 같은 섬유 분야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 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 남은 뒷얘기
“We have a deal(합의가 됐다).”
그야말로 마지막 협상 시한을 불과 20분 남겨 둔 4월 2일 낮 12시 40분.
모처에서 한국 측 협상단과 협정문안의 최종 조율을 마친 김현종 본부장은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본부장이 최종적으로 문안을 확인하고 미국 측에 던진 말은 ‘We have a deal’이라는 짧은 문장. 14개월간의 기나긴 협상의 종지부를 찍는 한마디였다.
특유의 ‘포커페이스’인 김 본부장은 이때도 웃음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에 있던 한국 협상단은 이 순간 분위기가 참으로 엄숙했다고 전한다. 협상 결과가 만족스러운 분과도 있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던 분과도 있었기 때문.
협상단의 한 관계자는 “김 본부장의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무겁고도 복잡한 감정이 밀려 왔다”고 말했다.
협상 결과에 대해 자국의 이해 관계자들에게 욕을 먹어야 하는 처지는 미국 측 협상단도 마찬가지였다. 막판 고위급 회담이 한창이던 지난 주말 미국 측 농업분과 대표인 리처드 크라우더 USTR 농업 부문 수석 협상관은 배 국장에게 “지금까지 나온 협상 결과를 보니 우리 측 업계가 너무 불만이 많아서 도저히 이 상태로는 미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배 국장은 나도 이번 협상이 끝나면 욕 좀 많이 먹을 텐데, 내가 미국 가서 살 테니, 대신 당신이 한국에서 살라”고 답해 서로 웃고 말았다.
한국 협상단의 작은 실수도 화젯거리였다.
지난해 12월 미국 몬태나에서 열린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 한국 협상단의 한 분과장이 갑자기 “비자 기한이 만료됐다”며 당황한 것. 협상을 위해 온갖 서류 준비를 하느라 자신의 여권은 정작 챙겨보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이에 외교부는 모든 ‘외교력’을 동원해 이 분과장의 미국 비자를 다음 날까지 재발급해 줬고 협상은 예정대로 무사히 진행됐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한미 FTA 실무협상을 이끈 숨은 주역들 | ||
직책 | 분야 | 이름 및 직책 |
고위급 협상 참석자 | 섬유 | 이재훈 산업자원부 차관 |
금융 | 김성진 재정경제부 국제업무정책관 | |
농업 | 민동석 농림부 농업통상정책관 | |
17개분과장 | 상품무역 | 이혜민 외교통상부 한미 FTA 기획단장 |
농업 |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 | |
섬유 | 황규연 산자부 섬유생활팀장 | |
원산지-통관 | 김경한 한미FTA 체결위원회 팀장전준홍 재경부 다자관세협력과장 | |
무역구제 | 백두옥 산자부 무역구제정책팀장이원태 재경부 관세제도과장김영재 주네제바 1등 서기관 | |
위생검역 | 윤동진 농림부 통상협력과장 | |
기술장벽 | 류경임 산자부 기술규제대응팀장 | |
투자 | 최경림 외교부 FTA 제1교섭관김필구 산자부 투자정책팀장 | |
서비스 | 김영모 재경부 통상조정과장유명희 외교부 FTA 서비스교섭과장 | |
금융서비스 | 신제윤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 | |
통신-전자상거래 | 남영숙 외교부 FTA 제2교섭관안성일 정보통신부 통상협상팀장정동희 산자부 디지털전략팀장 | |
경쟁 | 유명희 외교부 FTA 서비스교섭과장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국제협력팀장 | |
정부조달 | 안명수 외교부 다자통상국장장훈기 재경부 회계제도과장 | |
지식재산권 | 이건태 외교부 지역통상국장김정배 문화관광부 저작권팀장 | |
노동 | 박석범 전 외교부 국제경제국장(현 방글라데시 대사)이명로 전 노동부 국제협상팀장(현 노사정위원회 파견) | |
환경 | 박석범 전 외교부 국제경제국장김승희 환경부 지구환경 담당관 | |
분쟁해결 | 김원경 외교부 총괄팀장 | |
2개작업반장 | 자동차 | 김해용 외교부 지역통상국 심의관김용래 산자부 자동차조선팀장 |
의약품 | 전만복 보건복지부 한미 FTA TF국장 | |
자료: 외교통상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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