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괴물로 알려진 머크익스체인지가 온라인 경매업체 이베이의 ‘즉시 구매(Buy it Now)’ 기능에 대해 2001년 제기한 특허 침해 소송에서 머크익스체인지의 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것. 이 소송에서 패소했으면 폐업 위기까지 맞을 뻔했던 이베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허괴물이란 실제로는 사용하지도 않을 특허를 사들여 모아 놓고 다른 기업들의 특허 침해만 문제 삼아 거액의 소송을 낸 뒤 합의금을 받아 내는 데 주력하는 일종의 특허 소송 전문 기업을 말한다.
▽글로벌 기업의 목줄을 쥐고 있는 ‘특허괴물’=지난해 5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특허괴물을 봉쇄하는 새 판례를 내놓기 전까지 이른바 잘나가던 정보통신 기업들은 소송 한 번에 회사가 휘청거렸다.
미국 뉴욕 월가와 홍콩의 비즈니스맨들에게 필수품으로 꼽히는 무선 e메일 송수신기기 ‘블랙베리’가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
블랙베리 서비스업체 리서치인모션(RIM)은 무선통신 특허를 보유한 NTP라는 회사의 특허 침해 소송에 6억1250만 달러(약 6000억 원)를 주고 합의했다.
특허괴물들의 전형적인 수익구조가 바로 이렇다.
램버스, 아카시아 테크놀로지, NTP, 머크익스체인지 등 특허괴물은 특별한 생산라인이나 영업조직도 없이 특허 침해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한 기업을 발견하면 곧바로 달려들어 합의금을 챙긴다.
유럽식이동통신(GSM)과 관련한 핵심 기술 특허 4200여 건을 보유한 미국의 인터디지털은 삼성전자 LG전자 노키아 등 세계적인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2005년 노키아에 특허 소송을 걸어 2억5000만 달러의 특허료 지급 판결을 받아 냈고 2006년 9월 삼성전자도 인터디지털에 덜미를 잡혀 로열티 1억3400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미국 법원의 중재 결정을 받았다. LG전자는 인터디지털과의 특허 분쟁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해 2억8500만 달러의 특허료를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다시 괴물이 나타났다?=지난해 5월 미 연방대법원이 사용 금지 가처분을 불허하는 판례를 내놓으면서 특허괴물들은 손발이 묶였다. 그러나 업체들은 다시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은 실리콘밸리에 ‘괴물’이 출현했다고 보도했다. 이 괴물의 정체는 여전히 발명업체를 표방하고 있는 인텔렉추얼벤처스(IV).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기술부문 최고경영자였던 네이선 마이볼드 씨가 이 회사의 창립자다. 또한 인텔의 특허책임자였던 피터 뎃킨 씨가 IV의 매니징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뎃킨 씨는 인텔에 근무할 당시 특허괴물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에 괴롭힘을 당하던 대표적인 기업의 책임자들이 역사상 최대의 특허괴물로 의심되는 회사를 차린 셈. IV가 보유하고 있는 신기술과 특허는 3000∼5000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셰인 로빈슨 HP 기술부문 최고책임자는 “IV야말로 거대한 특허괴물”이라고 의심했다. 특허괴물의 시장 교란에 괴로워하며 이들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특허괴물의 행태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개발해 시장을 위협하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보기술(IT) 업계의 대기업들은 IV를 특허괴물이라고 경계하면서도 IV의 주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소니, 애플, 이베이, 구글 등이 IV의 지분을 갖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V에 4000만 달러를 투자했고 36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소니와 필립스, 마이크로소프트, 톰슨, IBM 등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인터트러스트, 콘텐트가드, MPEG LA, 오픈 인벤션 같은 특허괴물을 사들였다.
IV의 창립자인 마이볼드 씨는 이러한 현상을 “벤처캐피털에서 발명자본(Invention Venture)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평가한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기업들 ‘특허 맵’으로 ‘괴물’ 방어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의 한 글로벌 로펌은 한국의 한 대기업에 ‘특허 마이닝(patent mining)’과 ‘특허 맵(patent map)’ 서비스를 제안했다. 소송을 막는 데 급급하지 말고 특허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어 내자는 제안이었다.
이 대기업은 미국 유럽 등지의 정보기술 시장을 석권하고 있지만 현지의 경쟁업체 등이 제기한 특허 침해 소송을 무마하느라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특허 마이닝은 어느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전체 지식재산 가운데 특허가 될 만한 첨단기술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양한 첨단 기술들의 국내외 특허 등록 현황을 체계화한 것이 특허 맵이다. 특허 맵은 특허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작전 지도’에 해당한다.
글로벌 로펌 측은 바로 이 대기업에 빗발치는 해외의 특허 침해 소송에 끌려 다니지 말고 거꾸로 ‘특허를 특화한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라고 조언한 것.
이처럼 미국의 법률시장은 특허 문제를 둘러싼 새로운 경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특허사건 전문가인 서울북부지법 윤종수 판사는 “특허괴물을 비난하던 기업들도 이제는 방어를 위해 실용화하지도 않을 특허를 등록하고 있다”며 “기업들은 전략적으로 특허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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