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선호 업종별 No1]<12>현대중공업

  • 입력 2007년 6월 16일 03시 00분


《“여기에 초대형유조선(VLCC)을 지을 수 있는 독 2개를 지으시오.”

1993년 8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당시 명예회장)는 울산 현대중공업 공장의 북쪽 끝을 가리키며 이같이 지시했다. 난데없는 ‘왕회장’의 추상같은 명령에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당시는 해외 조선업계의 불황으로 정부가 직접 나서 조선소 신증설을 규제하고 있던 차였다. 자칫 정부에 대드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세계 해운업계의 불황으로 조선업계 시황도 비관적이었다. 임원들은 ‘득보다 실이 많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왕회장’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제8, 9독이 있는 제2야드는 현대중공업의 ‘보배’가 됐다.

폭 70m, 길이 360m의 세계 최대 규모의 독에서는 VLCC 등 초대형 부가가치 선박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시 실무부장을 맡았던 황병국 상무는 “조선 시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연매출액의 3분의 1에 이르는 5000억 원을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며 “당시는 무모한 도전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같은 도전이 결국 세계 1위를 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1] 불굴의 도전 정신 역사를 만들다

현대중공업은 출발부터 세계 조선업계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정주영 창업주가 1972년 조선소도 짓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소가 들어설 땅의 사진과 설계도만 달랑 들고 26만 t급 초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한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중공업의 진기록 행진은 이후에도 멈추질 않았다.

조선 인력과 기술이 전무했던 울산 미포만 허허벌판에서 2년여 만에 초대형 선박 2척을 성공적으로 진수한 데 이어 회사 설립 10년 만인 1983년에는 누적 건조량이 1000만 t을 넘어 최단기간 내 세계 1위 업체(수주 및 건조량 기준)에 올랐다.

당시 울산공장을 방문한 일본 조선업체 관계자들이 조선소 터 공사와 선박 건조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돌아간 사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전직 고위 임원은 “당시 휴일도 없이 일하던 현대중공업의 업무 스타일을 빗대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농담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현대중공업은 유럽과 일본의 쟁쟁한 조선업체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을 이 회사 특유의 ‘불도저식 업무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공사 마감날짜부터 미리 잡아놓고 장비와 인원을 집중 투입해 한달음에 해내는 이른바 ‘공기역산 돌관(突貫)공사’가 현대중공업의 DNA로 자리 잡았다는 것.

일각에서는 이 같은 기업 문화를 ‘해봤어’ 정신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남들이 ‘노(NO)’라고 할 때 ‘해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되받아치는 ‘정주영식 화법’을 빗댄 말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현대중공업의 ‘밀어붙이기식 업무 방식’이 ‘오늘의 현대’를 만들었지만 ‘내일의 현대’를 만들어 가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 경제가 촘촘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정신력’만을 강조하는 문화는 진부하다는 점을 꼬집는 말이다.

[2] 기업문화 현대와 닮았지만 다르다

‘시행착오를 위대한 유산’으로 여기는 현대중공업의 기업문화는 옛 현대그룹 ‘형제사’들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에는 형제사들과 다른 점도 적지 않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정주영 창업주의 6남으로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이 1990년 회장에서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일찌감치 ‘전문경영인 체제’를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2002년에는 정 의원이 대선 출마를 위해 아예 고문직에서 물러나고 현대중공업도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되면서 이 회사의 경영 투명성은 한층 높아졌다는 평을 듣는다.

해마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전통 제조업’ 외길을 걷는 것도 차이점 중 하나다. 대부분의 제조 대기업들이 금융업이나 골프장 사업 등 서비스업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한 것과 달리 현대중공업은 오로지 ‘한우물’만을 파 왔다.

현대중공업의 ‘용인술’이 변동성보다는 안정성을 우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전임자에게 많은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대과가 없으면 현상을 유지하는 예측 가능한 인사원칙이 조직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권오갑 홍보담당 부사장은 “현대중공업에는 특정 학연이나 인맥이 득세하는 줄서기 인사가 없다”면서 “다소 느리더라도 얕은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언젠가 빛을 보는 게 우리 회사의 미덕”이라고 강조했다.

[3] 부부싸움은 하되 이혼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의 노사 화합은 국내 기업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12년 연속 무분규 사업장으로 한국 노사관계의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회사는 1987년 6·29민주화선언 이후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사업장 중 하나였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동안 혹독한 노사분규와 원화가치 상승(원화환율 하락)까지 겹치면서 현대중공업은 최악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간다’는 ‘당근’과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채찍’ 전략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실제로 이 회사는 외환위기 당시 직원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아 직원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고 노조는 이에 ‘무분규’로 화답했다.

김종욱 노무담당 상무는 “우리 회사 노사는 ‘부부싸움은 하되 이혼은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오고 있다”면서 “서로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이 같은 문화를 정착시켰다”고 설명했다.

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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