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직 생활에서 정년퇴직한 최모(65) 씨는 근처에 산이 있는 동네로 이사했을 정도로 등산을 좋아한다.
아내와 함께 산을 오르던 어느 날.
산 중턱쯤 지났을 때 앞에 가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 다리 아파.”
“몇 년 만에 산에 왔더니 힘드네.”
그런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등산로 옆에 있던 나무로 다가가 제법 굵은 나뭇가지를 꺾었다. 지팡이로 쓰기 위해서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같이 산에 오르던 사람들도 좋은 생각이라면서 너도나도 나뭇가지를 꺾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나무에 핀 꽃을 꺾어 귀 옆에 꽂는 사람도 있었다.
누가 교사 출신이 아니랄까 봐 이 광경을 본 최 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젊은이들. 왜 산에 있는 나무를 꺾고 그래요?”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그러세요? 이 나무가 할아버지 거예요?”
주인 없는 나무인데 좀 꺾으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최 씨의 아내가 남편의 팔을 잡으며 만류해 더는 논쟁이 없었지만 최 씨는 산을 오르는 내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올라 준비해 온 음식을 먹는데 역시 낯설지 않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휴지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뒹굴고 있었다.
최 씨 부부는 “자기 집 마당이나 안방에도 저렇게 쓰레기를 버릴까” 하고 혀를 차며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저녁엔 뭘 해먹을까” 하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최 씨는 좀 전의 불쾌했던 기분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일까. 버스 창밖을 내다보니 옆 차로의 광택이 번쩍이는 승용차에서 무엇인가 튕겨져 나왔다. 담배꽁초였다.
왜 자기 차에 있는 재떨이를 놔두고 길거리에 꽁초를 버릴까. 혹시 저 차는 너무 고급이어서 재떨이가 없나?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워지더니 이내 입맛이 떨어졌다.
■ 해설
우리나라의 경제 체제는 시장경제다. 사유재산권은 시장경제를 원만하게 작동하기 위한 핵심 제도 중 하나다.
강요하지 않아도 누구나 열심히 일하는 것은 노력한 대가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사유재산권’이 보장된 때문이다. 모두 자신의 재산을 최대한 아끼고 돌보려는 동기는 한 국가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도 사적 소유권이 없는 것이 있다. 공기, 산, 강, 자연 속의 동물 등이다.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공유재산’ 혹은 ‘공유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불행히도 공유재산은 훼손되거나 남용되기 쉬운 운명을 지니고 있다. 바로 ‘공유재산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실제 기업이 폐수를 흘려보내거나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려 강물이 더러워지더라도 그 피해가 자신의 손실로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아껴서 사용하고 보호하더라도 그 이득이 바로 자신의 이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공유재산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사적 소유권이 없는 것이 근본 원인이다.
이에 비해 사유재산은 어떤가. 자신의 집을 깨끗하게 보존하면 집을 팔 때 돈을 더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므로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아껴 사용한다.
강물에 몰래 폐수를 배출하는 기업이나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는 등산객도 자기 것에 대해서는 다르게 행동한다.
고래와 호랑이가 멸종 위기에 처하고, 지리산에 반달곰을 풀어 주는 행위가 오히려 반달곰을 위태롭게 하는 역설적인 현상은 공유재산의 비극을 보여 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공유재산에 사적 소유권을 부여하면 비극을 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강이나 설악산에 대해 사적 소유권을 설정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차선책으로 정부는 행정 규제나 단속을 통해 공유재산의 비극을 막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사람들이 공유재산을 마치 내 것인 양 아끼는 게 결국엔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합리적 의사결정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한진수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경제학 박사
정리=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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