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방부는 사막의 모래바람이나 빗속, 혹한·혹서 지역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견고화 노트북’을 장병들에게 보급하기로 하고 납품업체 물색에 나섰다. 납품 업체 1순위는 한국의 중소업체인 A사였다.A사의 노트북은 2006년 미 국방부의 해외구매 물품경쟁력테스트(FTC)를 통과했다. 대형 군수업체인 레이션사가 A사에서 구매해 국방부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안정적인 양산체제 확립’ 등 미국 측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이 계속되자 A사의 자세가 달라졌다. A사는 자꾸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 사이 일본의 파나소닉이 견고화 노트북 개발에 나서 록히드마틴사와 손을 잡았다. 결국 올 8월 미 국방부는 파나소닉의 노트북을 납품받기로 결정했다.
■장면 2-치고나오는 중국 기업
“저가(低價)전략만으론 안 된다. 중국도 이젠 독자 브랜드를 키워 선진국 시장에서 일본, 한국 제품들과 품질 경쟁을 벌여야 한다. 베이징 올림픽이야말로 중국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절호의 기회다.”(레노보사 엘리스 리 부사장) 중국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인 레노보(Lenovo)는 베이징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로 등록한 뒤 성화봉을 중국 전통 두루마리 그림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이 성화봉은 세계 20개국에서 봉송돼 베이징에 도착한다. 레노보사는 구글 등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성화 봉송에 참가할 자원자 선발 대회를 열고 있다. 이 같은 행사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면서 성화 토치 디자인을 넣은 노트북을 제작해 세계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미국 시장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도전 의욕이 약해지면서 한국 제품의 미국 시장점유율이 계속 낮아지는 추세다. 반면 중국은 “선진국 시장에서 품질과 자체 브랜드로 인정받아야 한다”며 정부와 업계가 공동으로 대대적으로 브랜드 이미지 높이기에 나섰다.
중국이 전통적인 저가 공세에 멈추지 않고 품질과 브랜드 이미지 높이기에 속도를 내면 한국 기업들은 또다시 거대한 도전을 맞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국 제품의 미국 수입시장 점유율도 1995년 3.3%, 2001년 3.1%, 2006년 2.5% 등 10여 년간 계속 하락세다.
그나마 자동차, 휴대전화, 반도체 등 3대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수출의 44%를 차지해 편중 현상이 심각하다.
한 통상 전문가는 “하나만 ‘얻어터지면’ 심각해질 수 있는 취약한 수출 구조”라고 말했다.
KOTRA가 미국 내 바이어 143개사, 미국 진출 한국 기업 142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미 수출 부진의 최대 이유로 마케팅 역량 부족을 비롯한 인적 요인이 꼽혔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세계 각국 기업들의 해외 현지화 마케팅 능력, 외국시장 저변 접근력, 해외유통망 지배력 등을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은 대부분의 항목에서 미국, 일본뿐 아니라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 뒤지는 20위권으로 나타났다.
워싱턴의 한 통상전문가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표 주자 몇 곳을 제외하면 상당수의 한국 기업이 까다로운 선진국 시장 대신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빨리 이윤을 취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존스홉킨스대 객원연구원인 산업연구원 장석인 박사는 “과거 한국 기업들은 먼저 선진국 시장을 겨냥한 뒤 그 성과를 바탕으로 개도국 시장에 진출하는 ‘선난후이(先難後易)’ 전략을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미국 시장에서 큰 수익을 못 내도 선진국에서의 경험이 기술력과 이미지를 높여 제3국 시장 개척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전략이었는데 최근 중국 시장이 커지면서 선진국 시장에 대한 도전정신이 약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품질·브랜드 경쟁’ 선언=올해 미국에서 잇따라 터진 중국 제품 리콜 사태는 중국 정부와 기업들이 “싸구려 이미지, 남의 얼굴을 통한 판매(OEM)만으로는 선진국 시장 석권에 한계가 있다”고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 기업들은 베이징 올림픽을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레노보는 올림픽 스폰서 업체로서 얻는 후광 효과가 65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독일 등 13개국에 OEM 방식으로 에어컨을 수출하는 미디어(Midea)사는 수영 등 개별 팀의 스폰서를 하면서 자체 브랜드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통신장비업체인 ZTE는 30억 달러 매출의 12%를 연구개발에 투자하면서 미국 스웨덴 인도 프랑스 등에 연구센터를 세웠다. 이 회사의 허우웨이구이 대표는 “중국제는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확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탁기 등 가전제품 제조업체인 하이얼은 일본 프랑스 등 8개국에 디자인센터를 세웠으며 음악 스포츠 등 각종 문화 사업 스폰서로 나서고 있다.
1994년 5.8%였던 미국 시장에서 중국 제품의 점유율은 2002년부터 급성장해 올 7월에는 16%에 달했다.
국제무역 전문 변호사인 로버트 휴이 씨는 “대부분의 미국 소비자는 브랜드를 그 자체로 인지할 뿐 국적과 연결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대, 삼성과 Korea를 연결시키는 사람이 많지 않듯 중국 기업들도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이미지의 한계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무역협회 이우원 미주본부장은 “지금 중국 기업들은 예전 한국 기업들을 연상시키는 도전 자세를 보이고 있다”며 “속도가 예전의 한국, 일본보다 빠른 것 같다”고 말했다.
▽“선두 품목도 안심할 수 없다”=1일 워싱턴 근교의 ‘베스트 바이(Best Buy·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유통업체) 매장.
삼성, LG 등 한국 TV가 소니와 함께 진열대 맨 앞을 장식하고 있다. 비지오(Vizio·중국에서 생산하는 미국 브랜드), 샤프, 도시바 등이 뒤에서 2군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베스트 바이 관계자는 “현재는 한국 TV가 고급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워낙 순위 변동이 심해 현재의 추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한국 전자제품이 베스트 바이에 진출한 것 자체가 불과 수년 전의 일이다. 삼성 TV의 경우 2002년 DLP 프로젝션 TV를 내놓으면서부터 미국 시장에서 일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반면 샤프는 2005년 LCD 패널 개발 당시 라인투자를 주춤거린 탓에 2군으로 밀렸고, 도시바는 HDTV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6개월가량 지체해 역시 밀렸다.
한 통상 관계자는 “한국 냉장고가 베스트 바이에 처음 들어간 게 불과 5년 전”이라며 “전자제품은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상대적으로 적고 빨리 변한다”고 말했다.
KOTRA 워싱턴 무역관의 성희용 관장은 “한국 기업인들의 도전정신이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며 “무역 형태도 예전처럼 바이어가 개별품목을 구매하는 방식이 아니라 ‘토털 솔루션’ 쪽으로 가고 있는데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좋은 품질, 좋은 가격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안이한 접근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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