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인 1997년 11월 초 경제부처의 한 공무원이 필자에게 은밀히 해 준 말이다. 당시 금융시장은 갈수록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히든카드(hidden card)는 포커 판에서 쓰는 용어지만 일상생활에서 ‘숨겨 둔 비책(秘策)’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동남아시아에서 촉발된 외환위기가 한국 금융시장을 덮치고 있던 시기에 비책이 있다니 정말 반가웠다.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한 공무원이 10월 말에 나온 금융안정대책 보고서를 보라는 힌트를 줬다. 보고서 중간에 공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공란에 히든카드가 있었던 것.
여러 공무원을 취재한 끝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국제금융기관의 도움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일이지요. 여러 가지 파문을 생각해서 막판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필자는 즉시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금융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나서 경악했다. IMF 구제금융은 재앙(災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IMF의 지원 약속이 없는 상황에서 구제금융을 언급하면 한국은 즉시 국가 부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국익(國益)을 위해 히든카드의 공개를 유보해야 했다.
1주일 뒤 외국 언론을 통해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가 흘러나왔다. 결국 11월 21일 오후 10시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전격적으로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했다. 히든카드의 공개와 함께 환란(換亂)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가 부도까지 가진 않았지만 국민은 몇 년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한강의 기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는 절망이 온 사회를 덮었다. 모든 산업이 재기의 씨조차 마를 정도로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진짜 씨를 다루는 종자산업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스위스 신젠타, 미국 세미니스 등이 국내 종묘회사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한국 종자시장의 80%까지 장악했다. 한국의 고유 종자와 육종 기술이 해외로 넘어간다는 탄식이 나왔다.
환란 이후에도 정치인과 공무원의 크고 작은 실책(失策)이 이어졌지만 여러 산업의 씨는 싹을 틔우고 성장했다. 최근 들어선 한국 종자산업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종자산업의 부활이 기쁜 것은 그 상징성 때문이다. 식물에는 씨야말로 히든카드다.
토종 업체들은 국내 종자시장에서 지난해 56%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토종 기업인 농우바이오는 올해 매출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고 한다. 농우바이오는 지난 10년간 매출액의 25%를 기술 개발에 투자했고 일부 종자기술자는 다국적 기업을 나와 직접 창업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우리나라 채소 종자 수출액은 1876만 달러에 이르렀다(동아일보 11월 3일자 B2면 참조). 환란 극복의 히든카드는 바로 우리 기업과 기업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달 새 대통령을 뽑는다.
지금 기업인들은 갖가지 규제에다 반(反)기업 정서로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다. 새 대통령이 경제 대통령이 되려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기업과 기업인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되살려 줘야 한다. 그러면 기업과 기업인들은 앞으로 10년간 우리 경제를 다시 한 번 도약시킬 것이다. 환란 10년이 준 교훈이다.
임규진 경제부 차장 mhjh22@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