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금융감독청(FSA)이 “한국의 신용평가를 인정할 수 없으니 영국계인 SC제일은행은 FSA가 지정한 외국사의 평가를 받도록 해 달라”고 금융감독원에 요구한 것은 한국의 금융감독 당국과 신용평가사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신용평가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높이지 못하는 바람에 세계 신용평가시장에서 변방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본보 15일자 A2면 참조
한국 금융의 굴욕…금감원, S&P 등 직접 평가 허용 검토
○ 신용평가능력 함량 미달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한국신용정보 등 국내 신용평가업계를 대표하는 3개 회사의 평가능력은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신용평가능력을 보는 핵심 잣대인 △기업 및 금융회사와의 관계 △부수 업무 △부도 판단 기준 △정보량 및 정보의 질 △신용등급 결정 과정 등에서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이다.
금감원 조사 결과 일부 평가회사는 금융회사와 지나치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평가의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외국 평가회사는 금융회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주관적인 요소가 평가에 개입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 평가회사들이 컨설팅, 채권추심 등 부수 업무를 겸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A평가회사는 특정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와 컨설팅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어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 힘든 상태였다.
대출자산의 위험도를 정하는 부도 판단 기준도 외국 평가회사가 훨씬 엄격하다.
외국 평가회사는 채권은행이 부도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기를 연장하는 ‘강제적 채무 재조정’도 사실상의 부도로 보고 평가에 반영하는 반면 국내 평가회사는 청산 절차 개시 등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만을 부도로 본다.
평가 대상 회사와 관련한 정보량과 신용등급 결정 과정의 투명성에서도 국내 평가회사가 외국 평가회사에 많이 뒤처진 것으로 금감원 조사 결과 드러났다.
○ “안방을 쉽게 내줘선 곤란”
이에 따라 내년 1월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자산평가방식인 ‘바젤2’를 국내 평가회사들이 원만하게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바젤2는 은행이 기업에 대출할 때 개별기업 신용도에 따라 자기자본을 다른 비율로 쌓도록 하는 것인데, 지금처럼 기업 경영의 문제점이 노출된 뒤에야 신용등급을 낮추는 이른바 ‘뒷북 평가’ 수준으로는 정밀한 평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내 평가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도 영국 FSA의 요구대로 외국 평가회사가 국내에서 직접 평가업무를 하도록 허용하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외국 평가회사가 일단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 국내 신용평가업계가 고사(枯死)해 금융경쟁력 강화에 큰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국내 신용평가 방식을 꾸준히 개선해 세계 신용평가시장의 인정을 받는 것만이 한국 금융이 굴욕을 씻고 국제적 불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국내 신용평가사와 외국 신용평가사 비교 | ||
국내 신용평가사 | 쟁점 | 외국 신용평가사 |
일부 금융회사와의 긴밀한 관계가 평가에 영향을 주기도 함 | 기업 및 금융회사와의 관계 | 금융회사와 거리를 두며 독립성 유지 |
컨설팅이나 채권 추심 등 다른 업무를 병행하고 있어 이해관계가 상충할 소지 있음 | 부수업무 여부 | 평가업무만 하는 단일 사업부 체제여서 평가의 독립성 유지 |
법정관리, 청산, 화의 등 원리금 상환 불능상태만 부도로 정의 | 부도 판단 기준 | 원리금 연체상환이나 강제적 채무재조정도 부도의 개념에 포함 |
부정적 정보에 접근하기 힘듦 | 평가회사 정보 | 평가회사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정보가 풍부함 |
영업 담당 임원이 등급 결정에 참여하는 등 객관성 부족 | 신용등급 결정 과정 | 신용평가와 관련 없는 임직원을 등급 부여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 |
자료: 금융감독원, 신용평가업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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