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화합 열쇠는 경영진이 쥐고 있다. 사용자는 강자다.
주인 의식이 높은 경영진은 작은 균열이 발생하면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큰 구멍’을 미리 생각해야 한다. 서로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문제가 생기면 뿌리까지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경영진의 노력만으로 화합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노조도 회사 내에서 자기 몫만을 챙기는 욕심을 부리다가는 더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서강대 남성일(경제학) 교수는 “시장에 비슷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쟁자가 많아졌다. 소비자들의 요구 수준도 높아졌다. 파업으로 제품과 서비스에 조금만 흠결이 생겨도 소비자가 달아나는 시대”라고 말했다.
호흡을 맞춰 ‘2인 3각’으로 걷는 노사의 얘기는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간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세 회사를 살펴봤다.
노동부로부터 ‘노사문화 대상’을 받은 회사들이다.》
경기고속-남양유업-아모레퍼시픽의 아름다운 상생 문화
○ 경영자의 소통 의지가 중요
‘Win Win 상생경영’ 특집기사목록 ▶[상생경영]고용보장‘선물’+일 더하기‘화답’ 노사화합萬事成 ▶ [상생경영]노사발전재단 올 4월 출범… 새 패러다임 만든다 ▶ [상생경영]직원 & 직원가족 만족 프로그램 급속 확산 ▶ [상생경영]강성노조 대명사 한국바스프도 살 길 찾았다 |
7200명의 직원을 둔 그룹의 최고경영자가 일어섰다.
“제 휴대전화 번호는 011-758-****번입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이나 건의 사항은 물론 남편이 속을 썩이면 언제라도 전화하십시오.”
지난해 7월 서울 광진구 쉐라톤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열린 KD그룹 경기고속의 ‘사원가족 교양강좌 및 좌담회’ 말미에 허명회(76) 회장이 직원 부인들에게 던진 말이다.
이날 좌담회는 허 회장을 비롯한 회사 경영진과 노조위원장이 직원 부인들의 애로 사항을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부인들은 회사 방한복의 색깔을 바꿔 달라는 부탁부터 근무시간이 긴 것 같으니 운전기사 수를 늘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문까지 다양한 얘기를 쏟아냈다.
경영진과 노조는 즉석에서 개선하겠다는 답변도 했고 잘못 알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해명도 했다. 간담회가 끝날 무렵 허 회장은 더욱 원활한 소통을 위해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까지 공개했다.
직원과의 원활한 소통에는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경기고속은 직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으로 소통의 범위를 넓혔다. 허 회장은 매일 평균 5, 6통의 전화를 직원 부인들에게서 받는다. 전세금이나 학비 등 금전적인 얘기는 물론 남편의 바람기까지 상의하는 부인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대화’를 나눈다.
경기고속은 전체 직원 중 90% 가까운 사람이 승무원이고 매출액 대비 50% 정도가 인건비다. 1978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허 회장은 노사관계를 튼튼히 하지 않고는 회사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부터 시작된 투명경영과 나눔의 정신, 인간적인 예우는 흔들리지 않는 노사관계를 만들어냈다.
매달 노조에 회사의 손익계산서가 전달된다. 현장 사무실마다 단말기가 설치돼 일별, 월별, 분기별 수입과 지출을 노조원들이 언제든 볼 수 있다. 임금협상과는 상관없이 작년부터는 성과금도 지급한다. 경기고속을 포함한 그룹 내 8개 회사에는 비정규직 직원이 없다.
허 회장은 올해 3월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시민모임 ‘화해상생마당’이 주최한 ‘기업별 노사협력 사례 보고 모임’에서 일반 기업의 경영자가 들으면 놀랄 만한 얘기를 했다.
“저는 우리 승무원들을 해고하지 않습니다. 인사위원회에서 해고처분을 받았더라도 부인과 함께 와서 잘못을 뉘우치면 근무하도록 다시 기회를 줍니다.”
노사간의 신뢰는 놀라운 사건을 만들었다. 경기고속은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3년째 임금 인상 폭을 노조 측에 위임했다. 가끔 ‘노조가 사측에 백지위임을 했다’는 소식과는 전혀 다른 새 방식이다. 노조는 임금을 연간 평균 5%가량 올렸다.
“생산성 향상” “처우 개선”… 노사 모두 자기역할 다하기
○ 화합의 장애요소를 제거하라
누구나 식당을 오가며 제안서를 쓸 수 있다. 건의사항이 있으며 처리 현황과 최종 처리 결과가 함께 기재된다. 그 옆에는 전년도 NG 포인트 사례집이 함께 놓여 있어 작년에 어떤 사항이 개선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남양유업 노사가 노사화합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에 매진하기 위해 조성한 환경이다.
올 6월 현장직 사원과 사무직 사원이라는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현장직이라는 지칭이 자칫 사원 간에 이질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같은 곳에서 하루 8시간 넘게 일을 하지만 친밀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회사와 노조는 회의를 거쳐 ‘현장직’ ‘사무직’ 대신 ‘생산관리직’과 ‘사무관리직’으로 이름을 바꿨다. 가족을 공장으로 초대하는 행사를 열고 체육대회와 등산대회도 가족 초청 모임으로 개최해 유대감을 높였다.
자칫 형식적인 제도가 될 수 있는 ‘NG 포인트’ 제도가 효과를 내는 것은 사원 간, 노사 간 벽이 없기 때문이다. 남양유업에는 노사소위원회라는 독특한 조직이 있다. 사업장 단위로 분기별로 열리는 노사협의회와는 별도로 물류팀, 생산팀, 생산기획팀, 공무팀 등 소규모 팀별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갖췄다. 늘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애로와 불만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의사소통이 원활한 팀에는 포상이 주어진다.
‘1일 팀장제’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방법도 도입했다. 직원이 팀장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관리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됐다.
이형섭 노조위원장은 “한때 노조는 고임금을 요구하고 회사는 고생산성을 요구하는 등 서로 ‘자기 몫 찾기’만 하는 대립적 관계였다. 이제 노조는 참여와 협력, 생산성 향상을, 회사는 종업원 처우 개선 등 각기 ‘자기 역할 다하기’를 최우선으로 하는 공동체적 노사관계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 노사가 함께 재미있는 일터 만들기
아모레퍼시픽은 1991년의 파업으로 파업조합원 477명이 연행되고 회사도 막대한 손실을 입은 아픈 과거가 있다. 파업이 끝나고 노조는 ‘서로가 지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판단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조는 파업 후 악화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생산성 향상 운동과 30분 일 더하기 운동을 전개했다. 무분규 단체교섭도 제의했다.
회사는 노사 대화채널을 구축하고 경영정보를 공유했다. 매월 열리는 월례조회 때 전 사원에게 최고경영자가 경영상황을 설명한다. 최고경영자와 e메일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1994년에는 발전적인 노사관계를 위한 ‘노사공동 결의대회’를 가졌고 1997년에는 노조가 주축이 돼 회사 제품 구매운동인 ‘우리 제품 찾기 캠페인’을 펼쳤다.
현재 아모레퍼시픽의 노사 화합은 ‘재미있는 일터 만들기’로 향하고 있다.
모든 직원은 매주 수요일이면 반드시 오후 6시에 퇴근해야 한다. 야근이 용납되지 않는다. ‘패밀리 데이’로 정한 이날엔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길 권장하고 있다.
‘호칭 문화 바로 세우기’ 캠페인도 벌였다. ‘대리님’ ‘과장님’ ‘팀장님’이란 직함 대신 이름 뒤에 그냥 ‘님’을 붙여 부른다. ‘서경배 사장님’도 그냥 ‘서경배님’이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본사 10층 구내식당은 매일 오후 6시 반이면 맥주와 안주가 제공되는 ‘굿타임 파티’ 공간으로 바뀐다. 작년 6월부터 식당을 열린 회의를 위한 공간으로 개방하고 맥주와 안주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재미있는 일터 만들기의 하나로 진행되는 이 제도는 팀 간 벽을 허무는 ‘커뮤니케이션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다.
양육과 교육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은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올해 3월 경기 수원시 일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해 직장보육시설인 ‘아모레퍼시픽 수원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2004년에는 서울, 2005년에는 경기 용인시에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노사업무를 담당하는 박성철 상무는 “1991년 이후 올해까지 16년째 분규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활동은 시작에 불과하다. 단기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한 몸 같은 노사관계’가 뿌리내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계 개선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