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변호사는 폭로 기자회견 다음 날 아침 라디오 대담 프로에 출연해 1999년 당시 삼성그룹 전체로 50조 원의 자본잠식이 있었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그는 1999년 말 환율이 1700원까지 급격히 올라가 삼성이 실질적 자본잠식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에 환율은 1965원까지 치솟았으나 1999년 말에는 1145원으로 안정됐다. 삼성은 당시 외화부채 비중이 높지 않았는데 환율 때문에 자본잠식이 발생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의 속내를 알 수 없다.
삼성 비자금 문제를 들고 나오다가 갑자기 수조 원대의 분식회계를 들먹이는 것은 분식회계가 비자금으로 연결된다는 암시를 주어 비자금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비자금은 수입을 빼돌림으로써 이익 감소를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이익을 부풀리는 분식회계로는 조성할 수 없다. 삼성이 계열사를 동원해 이중장부로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주장과 대규모 분식회계를 했다는 주장은 뜯어 보면 방향이 서로 다르다.
회계학을 조금만 알아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허점투성이 폭로를 전문성이 생명인 시민단체가 편들고 있다. 삼성을 향해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 시민단체는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쓰지만 폭로 내용을 지원하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일부 시민운동가들은 50조 원 자본잠식을 전제로 삼성 책임론을 거론한다.
삼성 사태는 이재용 씨가 삼성 경영권의 핵심인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헐값에 사들였다며 매각에 관여한 에버랜드 임원을 배임혐의로 고발하면서 악화됐다. 전환사채는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 때문에 실세 금리보다 낮은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발행된다. 전환사채의 가치는 발행회사의 주식가치와 연결된다. 발행회사의 실적이 악화되면 주식으로 전환도 못해 보고 이자 손실만 감수하고 끝난다.
에버랜드가 경영권을 보유한 삼성 계열사가 분식회계로 치장해 그럴싸하게 보였지만 실제로는 50조 원에 이르는 자본잠식 상태였다면 전환사채를 다른 주주 배정분까지 인수한 이재용 씨는 바가지를 쓴 것이고 에버랜드 임원들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이재용 씨에게 덤터기를 씌운 셈이 된다. 삼성의 자본잠식이 사실이라면 에버랜드의 배임혐의는 성립되지 않고 이재용 씨가 바가지를 쓰면서 취득한 주식의 가치가 외환위기 이후 경영 호조로 상승했다고 봐야 한다.
배임혐의로 고발한 측에서 당시에 분식회계로 자본잠식 상태였음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 삼성 사태의 참모습이다. 무조건 몰아붙이다 보니 서로 상충관계에 있는 혐의까지 뒤집어씌우게 됐다. 대표 기업 삼성이 수조 원의 분식회계와 수십조 원의 자본잠식 혐의를 받는 황망한 사태는 국내 회계투명성에 대한 국제적 평가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감독당국은 폭로 주체에 대해 근거자료를 요구하고 현재 상태에서 실행 가능한 방법으로 조속히 회계감리를 실시해 의혹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막아야 한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대 교수·한국회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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