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100년 기업’을 가다]⑨유리공예품제조 기타이치 가라스

  • 입력 2007년 12월 20일 06시 44분


석유램프 수요 줄자 수제 유리공예품으로 승부

발상의 전환이 ‘오타루=유리’ 낳았다

《“기타이치 가라스는 오타루에서만 팝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서쪽의 항구도시 오타루(小樽). 메이지(明治) 말기의 흔적이 잘 보존돼 있는 인구 15만의 이 도시는 연간 700만∼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이자 일본 최고의 유리제품이 생산되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가스등과 운하, 역사적 건축이 즐비한 거리에서는 ‘기타이치 가라스(北一硝子)’라는 간판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12일 오타루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된 기타이치 가라스 3호관을 찾아 창업자의 3대손인 아사하라 겐조(淺原健藏·61) 사장을 만났다.》

“오타루에 와야만 살 수 있다” 아예 통신판매도 안 해

관광객 ‘쇼핑 필수품’ 인기… 지역 경제 부흥 이끌어

○ 지역 명물 상품으로 우뚝

창업자 아사하라 히사키치(淺原久吉)는 오사카(大阪)에서 유리공법을 배운 뒤 1901년 오타루로 터전을 옮겨 석유램프를 만들었다. 오타루가 홋카이도 개척의 관문으로 번성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회사 이름은 ‘아사하라 가라스’.

그 뒤 그는 청어 잡이에 사용하는 ‘우키타마(부낭)’를 개발해 홋카이도 어업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평을 얻었다. 낙농 농가를 돌며 개량을 거듭한 뒤 내놓은 우유병은 공급이 달려 1911년에는 대량생산하기 위해 공장을 세웠다.

2대 히사시게(久重)가 판매부문 책임자가 된 1940년대, 회사는 홋카이도 일대에 공장을 5개나 운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는 법. 전기 보급과 함께 가정에서 석유램프가 밀려났고 어업이 쇠퇴하면서 부낭 수요도 격감했다. 플라스틱과 종이팩의 공습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오타루 경제도 차츰 쇠퇴해 갔다.

1970년, 25세에 가업을 잇게 된 현 사장 겐조 씨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악화된 경영을 타개하기 위해 문을 일단 닫고 새 출발을 하기로 한 것.

주변에서는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는 “회사의 존재 방식이 변하고 있다”며 밀어붙였다.

“새 회사 이름은 듣기 쉬우면서도 강한 느낌을 주는 ‘기타(北)’를 넣기로 했습니다. ‘北’이란 한자가 좌우대칭이라 유리에 새기면 뒷면에서도 읽힌다는 것도 큰 이유였죠.”

1971년 ‘기타이치 가라스’가 탄생했다. 주력 상품도 램프가 아니라 도시생활인을 겨냥한 고급 수제 유리공예품으로 전환했다. 자신은 판매를 맡고 과거의 장인들에게 납품을 의뢰했다. 고객이 직접 램프 불빛의 장점을 체험케 하기 위해 찻집과 레스토랑을 열고 그 귀퉁이에서 유리공예품을 팔았다.

마침 전국에 배낭여행 바람이 불었다. 오타루의 유리제품은 배낭족의 선물용으로 팔려나가 전국에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차츰 늘려간 매장이 현재 10곳, 총 6600m²의 공간에서 340여 명의 종업원이 일한다. 매출은 철따라 들쭉날쭉한 관광객 수와 정확하게 비례한다고 한다.

○ 오타루와 운명을 같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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