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강남 모 지점에서는 최근 적지 않은 규모의 자금이 이탈해 비상이 걸렸다. 가뜩이나 예금이 모자라 어렵던 상황에 12월에 만기가 된 한 중소기업의 1년제 법인 정기예금 80억 원 가운데 50억 원이 다른 은행으로 빠져나간 것. 다른 은행이 금리를 0.2% 더 얹어 준다는 게 이유였다. 은행 측은 사정사정해서 80억 원 가운데 30억 원을 재유치했지만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 벌어질까 전전긍긍이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은행들이 고금리 경쟁으로 적극적인 예금 유치에 나서면서 기업들이 ‘금리 쇼핑’에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예금을 통해 더 많은 이자를 받아내기 위해 여러 은행의 금리 수준을 파악한 뒤 돈을 맡기는 것. 은행과 기업의 역할이 거꾸로 된 셈이다.
금리 따라 기업 자금 이동… 주거래은행 개념 사라져
기업이 굴리는 돈에는 영업활동을 통해 그날그날 벌어들인 돈도 있고 금융회사에 맡겼는데 만기가 돌아와 다른 곳에 새롭게 맡겨야 할 필요가 있는 돈도 있다. 현금 흐름이 좋은 회사들은 단기자금 운용으로 짭짤한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금리에 민감하다.
신한은행 기업고객부 윤주호 부부장은 “기업의 자금관리 실무자들도 운용 성적에 따라 평가를 받는데 인사철인 연말에는 조금이라도 더 이자를 많이 주는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기업 자금 운용처는 양도성예금증서(CD)나 정기예금, 수시로 입출금이 가능한 머니마켓펀드(MMF)나 수시입출금식예금(MMDA) 등으로 다양한데 예금 규모는 수억 원에서 수백억 원까지 회사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하나은행 기업본부 김낙근 과장은 “금리 차가 심하지 않을 때에는 기업들이 평소 거래관계나 인간관계로 예금을 했는데 요즘은 은행들이 더 높은 금리를 준다고 하면 곧바로 자금이 이동한다”며 “기업들이 은행에 일일이 전화를 해 금리를 서로 협상하다 보니 은행끼리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A기업=B은행’과 같은 주거래은행의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됐다.
금리 부담은 대출자에게 전가하는 은행
은행이 기업들 눈치를 보게 된 이유는 자금난 때문이다. 올해 증시 활황으로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나 펀드 등으로 예금이 빠져나가면서 은행이 모자란 자금을 CD나 은행채 발행으로 메우고 있다. 10월 말 현재 은행권의 총예금은 579조9440억 원인 데 반해 총대출금은 790조3590억 원으로 예금보다 210조4150억 원이나 많다. 대출금이 예금의 136%에 이른다.
은행은 빈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금리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 내부 유보금도 많고 자금 여유가 있는 기업들에 손을 벌리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은행의 고금리 경쟁은 금리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결국 피해가 대출자들에게 옮아가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CD만 해도 은행들이 마구잡이로 발행하면서 3개월물 CD 금리는 지난해 말 연 4.86%에서 18일 현재 5.77%로 0.91%포인트나 상승했다. 은행권 CD 순발행 규모는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27조800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조4000억 원의 11.6배나 된다.
한국금융연구원 한재준 연구위원은 “고금리를 주고 자금을 조달한 뒤 이를 고금리로 받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며 “은행이 대출을 너무 많이 해 놓고 대출자들에게 금리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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