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 남편과 맞벌이를 하는 대학교수 A(57) 씨는 지난해 초 아들(30)을 미국 동부 지역으로 유학 보냈다. 대학 졸업 후 금융회사에서 2년간 일한 아들이 “이대로 있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미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따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A 씨는 유학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국내 MBA 과정을 알아봤지만 결국 미국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국내 과정도 등록금이 연 4000만 원에 이르는 데다 “영어도 중요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
프리랜서 작가인 싱글 여성 B(35) 씨는 지난해 말 홍콩에 갔을 때 영국계 패션 브랜드인 ‘H&M’ 매장에 들렀다. 그는 여기서 5만 원에 올겨울 유행하는 부티(발목 아래까지 오는 짧은 부츠)를 사 갖고 와서 겨울 내내 즐겨 신었다. B 씨는 “국내에서 이 제품을 사려면 최소 15만 원은 줘야 한다”며 만족해했다. 그는 한 시즌 유행하는 아이템은 주로 해외에서 산다. 한국은 세일도 잘 안 하고 비싸기만 한 데 비해 외국 매장은 상품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한 것이 이유다.
최근 내국인의 해외 소비가 급증하면서 지난해 한국의 서비스수지 적자가 200억 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 전문가들은 국내 서비스산업이 각종 규제에 묶여 품질과 가격 면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의 높아져 가는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해 왔다. 특히 부유층이 해외에서 소비를 많이 하면서 국내에서 일자리 창출이 줄어들어 그 피해를 전 국민이 보고 있다는 것.
동아일보는 지난 한 해 A 씨 부부의 가계부와 B 씨의 신용카드 사용명세서를 받아 전문가들의 지적이 맞는지 들여다봤다.
○ 유학, 쇼핑비로 절반가량 해외 지출
연소득이 1억6000만 원가량인 A 씨 부부의 지난해 소비지출액(납세, 금융투자 제외)은 1억4500만 원 수준.
국내 소비로는 우선 식비와 교통비 의료비 관리비 등을 합쳐 4200만 원을 썼다. 또 부모님 용돈과 기부금, 경조사비로도 연간 2000만 원가량이 지출됐다.
그러나 해외 소비는 아들 유학 비용으로만 이미 국내 소비지출액을 넘어섰다. 캠퍼스 외곽에 있는 원룸 임대료와 식비 교재비 등으로 6000만 원이 들었고 등록금을 보태 주는 데도 800만 원이 나갔다.
A 씨 부부는 지난해 두 차례 중국과 동남아로 골프 여행을 떠났고 아들이 있는 미국에도 두 번 갔다 왔다. 이 비용을 합하면 1500만 원가량. 결국 A 씨 부부는 전체 소비지출의 57%인 8300만 원을 해외에서 쓴 셈이다.
B 씨는 출장과 휴가로 지난해 모두 7차례 해외를 다녀왔다. 태국 홍콩 등 동남아 국가와 중국 일본, 멀게는 미국 뉴욕 등을 오갔다. 그는 한 번 출국할 때마다 70만∼100만 원을 쇼핑비로 썼다. 중저가 의류 매장에서는 좋은 물건이 많으면 한 해 입을 옷을 다 장만해 두기 위해 수십만 원을 한꺼번에 ‘긁을’ 때도 있었다.
또 B 씨는 비싼 국적기를 이용하는 대신 외국계 항공사를 주로 이용했다. 항공권 구입비로는 약 80만 원을 결제했다. 그의 지난해 해외 소비액은 전체 카드 결제액(1700만 원)의 약 41%인 700만 원 선이었다.
○ 부유층의 욕구를 국내에서 해결하도록 유도해야
이들에게 해외 소비액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다.
A 씨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국내서만 교육을 받았다. 부담은 되지만 뒤늦게나마 새로운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외국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또 “우리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하고 싶지만 그린피나 호텔비가 너무 비싸다”고 설명했다.
B 씨는 “한국에서는 업체들이 고가(高價) 마케팅을 펴기 때문에 비싸다. 또 백화점 말고는 외국만큼 여러 명품 브랜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매장이 거의 없다. 가격도 싸고 물건도 다양한 해외에서 쇼핑하는 게 소비자로선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즉 획일화된 교육 제도와 대학 규제는 A 씨 자녀의 미국 유학을, 신세계첼시 같은 대형 유통단지에 대한 규제는 B 씨의 해외 쇼핑을 각각 부추긴 셈이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해외 유명 교육기관이나 병원이 국내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물론 교육 및 의료 허브 정책을 통해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키워 오히려 외국인까지 끌어들이는 싱가포르의 정책을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골프장이나 대형 유통업에 대한 규제를 풀면 해외 골프나 여행, 고가품에 대한 소비를 상당 부분 국내에서 흡수할 수 있다는 것.
한국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국내 관광 활성화 등으로 내국인의 해외 소비와 외국인의 국내 소비가 균형을 이룰 경우 연간 25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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