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가뜩이나 여론 안좋은데…” 대응 고심
단군 이래 최고액 민사소송이라 불린 이른바 ‘삼성자동차 채권단’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은 삼성 측이 채권단과 체결한 손실 보상 합의가 적법한 효력을 갖는지였다. 이를 둘러싸고 삼성 측과 채권단은 2년 넘게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여 왔다.
31일 1심 법원은 채권단의 손을 들어 줬다. 재판부는 약정금 지급이 늦어진 데 따른 이자율을 채권단의 요구보다 낮게 정한 것 외에는 대부분 채권단에 유리한 쪽으로 판결했다.
▽삼성차의 법정관리 신청이 소송 발단=삼성 측은 1999년 6월 삼성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삼성차 채권단의 손실을 보전해 주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합의서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도의적 차원에서 채권단의 손실 보전을 위해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채권단에 무상 증여하고 △이 회장과 삼성 계열사들은 이 주식을 2000년 12월 31일까지 처분한 뒤 처분 대금 2조4500억 원을 채권단에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채권단과 삼성 측은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주당 70만 원씩 총 2조4500억 원의 가치로 평가했다. 삼성생명 주식 처분 대금이 채권단에 지급하기로 약속한 2조4500억 원을 못 채우면 이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을 최대 50만 주까지 추가로 증여해 부족분을 보충한다는 내용도 합의서에 포함됐다.
그러나 삼성 계열사는 합의서에서 정한 기한 내에 주식을 처분하지 못했다. 채권단이 자체적으로 추진한 주식 매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서울보증보험이 유동화 전문회사에 주식 116만5955주를 양도하는 데 그쳤다.
그러자 채권단은 채권 소멸 시한인 2005년 12월 31일을 20여 일 앞두고 이 회장과 삼성 계열사들을 상대로 부채 2조4500억 원과 연체 이자, 위약금 등을 포함해 총 5조2034억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합의서 효력 놓고 공방=삼성 측은 “당시 합의서의 효력이 없다”며 약정금을 줄 수 없다고 맞섰다. 당시 합의서가 우월적 지위에 있던 채권단의 부당한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는 이유에서다.
삼성 측은 또 이 회장이 주식을 무상 증여한 것은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에 대한 도의적 책임 때문이지 법적인 책임 때문이 아니라며 더 이상의 책임은 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채권단의 강압에 의해 합의서가 작성됐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삼성 측이 여러 사정을 고려한 뒤 이해득실을 따져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성, “패소는 예상 밖”=삼성그룹은 “판결 내용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며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삼성 전략기획실 관계자는 “많은 쟁점에서 삼성이 패한 것은 예상 밖”이라며 “그룹 법무팀의 검토 결과가 나오면 공식 반응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삼성이 항소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삼성 관계자는 “항소하면 원유 유출 사고에 이어 또다시 책임 회피 논란이 제기될까 두려운 심정”이라고 말했다.
채권단인 서울보증보험 측은 “조만간 채권단이 모여 판결 내용을 검토한 뒤 후속 대응을 논의할 것”이라며 “일부 승소하긴 했지만 항소할지 아니면 이번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등에 대한 검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