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은 지금 지역구에서 등산 행사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저도 연락이 닿지 않으니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대통합민주신당 A 의원의 보좌관)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에 대한 A 의원의 의견을 듣기 위해 의원 본인과 보좌관, 수행비서의 휴대전화로 10여 차례 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하라” “지방에 중요한 일정이 있다”는 응답뿐이었다.
취재팀의 전화를 받은 상당수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에 머물고 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비준안 처리가 어떻게 돼 가는지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비준에는 찬성하지만 정작 전망은 어둡다’는 모순적인 설문 결과는 이처럼 총선을 앞둔 의원들의 눈치 보기와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의원들의 이런 행태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한나라당 수도권 지역구의 한 의원은 요즘 한미 FTA 비준에 대한 국회 분위기를 묻는 취재팀의 질문에 “의원들끼리 만나도 요새 그런 얘기 안 한다”고 말했다. 다른 한 의원은 “워낙 (동료 의원들을) 뵌 지가 오래돼서 분위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부 의원은 “총선이 코앞이다. 다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며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취재팀의 설문에 마지못해 찬반을 표시했지만 그 속내는 무관심이었다. “왜 이런 민감한 시기에 이런 걸 묻나” “별 관심도 없는 걸 물어서 뭐 하냐”며 되레 취재팀을 꾸짖는 의원도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비례대표 의원은 “얼마 전 의원총회에서도 FTA 얘기가 나오긴 했는데 활발하게 토론이 붙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역구나 시민단체 등에 대한 눈치 보기와 네 탓 하기 식 반응도 적지 않았다.
강원 농촌지역 출신의 한 의원은 “이번 국회에서 꼭 비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사실 지역구 생각하면 찬성한다는 말을 못 하지만 무기명 설문이라니까 찬성이라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농촌에 지역구를 둔 많은 의원이 “곤란하니 무응답으로 처리해 달라”고 부탁조로 말했다. 서울 지역의 한나라당 의원은 “명분에는 다들 동의하는데 자칫 시민단체나 농민단체의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비준 지연에 대해 ‘남의 탓’ 하는 의원도 많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신당은 말로만 찬성한다고 하고 사실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꼬집었고 신당 의원들은 “한나라당이 정부조직개편 등에서 양보를 안 해 FTA 비준도 덩달아 지연되고 있다”며 맞받았다. 일부 의원은 “후속 대책이 미흡했다”며 정부에 책임을 돌렸다.
과거 공개적으로 FTA를 지지했던 의원들마저 대선 이후 유보로 돌아선 경우가 많아 비준안 통과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윤영규 FTA국내대책본부 대외협력단장은 “이 같은 현상은 여야 의원이 모두 ‘한미 FTA 비준이 총선 득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역구별로 찬반 엇갈려
비준에 대한 의원들의 견해는 지역구, 상임위별로 확연하게 갈렸다.
서울 및 6대 광역시의 경우 2월 비준에 찬성하는 비율은 69.4%였지만 그 이외 지역은 38.4%에 불과했다. 시도별로는 울산 및 대구가 100%, 인천 89%, 경북 73%, 서울 54% 등이었다. 전남·전북·광주 지역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은 설문에 응한 24명 중 단 2명만 2월 비준에 찬성했다.
상임위별로는 FTA 주무 상임위인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경우 설문에 응한 20명 중 14명(70%)이 2월 국회 통과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들 중 2월 통과를 전망하는 의원은 7명(35%)에 그쳤다.
이 밖에 국방위(82%), 재정경제위 교육위(이상 73%) 등은 찬성 비율이 높았지만 농촌 지역구 출신이 많은 농림해양수산위는 15명 중 2명(13%)만 찬성했다.
또 당선 횟수가 높은 ‘고참’ 의원일수록 비준에 적극적이었다. 초선 의원의 경우 2월 국회 통과에 찬성하는 비율은 47%였지만 재선은 64%, 3선 이상 의원은 69%가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 이는 중진 의원일수록 지역구 기반이 튼튼해 FTA에 대한 소신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펼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설문조사 어떻게
의원들에 일일이 전화…익명 전제로 의견 물어
이번 설문조사는 국회의원들의 솔직한 답변을 듣기 위해 응답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진행됐다.
설문조사 과정에서 상당수 의원이 “익명이냐, 실명이냐”고 물은 뒤 “익명이 보장되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의원들을 직접 접촉해 답변을 들었으며, 13명의 의원은 보좌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답변했다.
24명의 의원은 보좌관을 통해 의원을 접촉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설문조사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대행기관에 맡기지 않고 동아일보 기자들이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간 직접 설문조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