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가 상품과 서비스의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데 중점을 두는 것에 비해 EPA는 상품과 서비스 부문은 물론 투자제도 정비, 경쟁정책의 조화, 지적재산권제도 및 노동력 교류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의 경제협정이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처럼 먼 나라와 FTA를 맺으려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EPA 정책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 집중돼 있다. 일본이 EPA를 체결한 8개국 중 멕시코와 칠레를 제외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등 6개국이 아세안 국가이다.
지난해 일본 재무성 통계에 따르면 이들 6개국이 일본의 무역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로 EU의 25개국을 합친 비중과 같다.
일본이 아세안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1985년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해결을 위해 엔화의 가치 절상을 골자로 하는 ‘플라자 협정’ 체결 후 치솟는 엔고를 감당하지 못한 일본 기업들이 줄줄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의 대미(對美)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와 가전제품의 관세율은 이미 0∼4%로 낮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FTA 체결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일본은 2004년 공개한 ‘경제연대촉진 기본방침’에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세계무역기구(WTO)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과의 EPA를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EPA는 수출뿐만 아니라 ‘투자’ 확대를 목표로 한다. 말레이시아와 EPA가 발효된 2006년 일본 기업들의 말레이시아 직접 투자는 전년보다 485% 급증해 미국을 제치고 1위를 했다. 일본 외무성은 지난달 ‘상대국의 투자제도와 지적재산권제도가 정비되면 일본 기업의 현지 생산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일본의 EPA가 무서운 것은 일본 기업과 아세안 국가들의 끈끈한 ‘생산 네트워킹’이 일본과 직접 FTA를 맺지 않은 국가들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2005년 태국과 호주 간 FTA가 발효되면서 태국산 일본차의 대(對)호주 수출은 크게 증가한 반면 이로 인해 한국 자동차업체들은 간접적인 피해를 보았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태국에서 생산된 혼다 ‘시빅’의 수출 물량은 전년보다 29% 증가했다. 호주와 동남아시아 국가로 수출된 대수만 7만8798대에 이른다. 태국과 FTA를 맺으려던 인도는 가전과 자동차 부문에 일본 제품이 밀려올 것을 우려해 협상을 미루고 있다.
정성춘 KIEP 일본팀장은 “지난해 한국도 아세안과의 FTA가 발효돼 수출 확대의 길이 열렸다”고 평가하면서도 “FTA의 ‘생산 네트워킹 효과’로 오히려 아세안 국가 소재 일본 기업들이 생산한 자동차와 가전의 수입이 급증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