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랏프라오 거리의 대형 쇼핑몰인 센트럴플라자.
지난달 중순 찾은 이곳에는 ‘태국에 와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글로벌 브랜드 매장과 영어 간판이 가득했다.
멀리서도 파란색 간판과 로고가 한눈에 들어오는 널찍한 삼성 매장엔 TV, 냉장고 등 각종 가전제품이 전시돼 있었다. 일본 기업인 도시바와 소니 매장 진열대엔 노트북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가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동차를 전시한 1층 행사장에선 도요타의 신차 홍보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이처럼 공산품 코너엔 삼성 소니 필립스 등 다국적 기업 매장이 자리를 차지한 반면 태국 브랜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이머징(신흥) 국가’로 꼽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글로벌 기업과 토종 브랜드의 부재로 인해 경제성장의 한계에 부닥쳐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다국적 기업에 공산품 시장 내줘
이들을 가리켜 ‘동남아의 호랑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1970∼80년대 고도성장을 통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린 것에 빗댄 표현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엔 5억7000만 명의 인구와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한국의 삼성, LG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없는 점이 문제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자원개발과 내수에만 의존하고 첨단산업과 중공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결국 동남아의 경제성장에는 한계가 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국적 컨설팅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선정한 ‘이머징 국가 100대 기업’을 살펴보면 동남아 국가의 기업은 모두 합해도 5개에 불과하다. 적게는 6개, 많게는 41개에 이르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국가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수다. 특히 5개 업체 중에서도 3곳은 식료품 제조업체다.
이코노미스트는 한국과 대만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제품과 기술로 수출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룬 반면 동남아 지역의 고부가가치 산업은 외국계 기업이 주도한다고 전했다. 첨단기술 제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려 노력하기보다 수입에 의존하며 수요를 채운다는 것.
이에 따라 동남아 첨단산업 기업은 한국 일본 등 기술이 앞선 외국 기업의 생산기지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태국에서 자체적으로 자동차 브랜드를 만들려는 시도 등이 있었지만 저임금과 내수시장 규모 면에서 중국에 밀리면서 고전하고 있다고 이 잡지는 지적했다.
○ 다민족-족벌경영-정경유착도 문제
동남아 지역에서 글로벌 기업과 브랜드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세계적 수준의 엘리트 부족 △다민족 다언어로 인한 통합력 상실 △족벌경영 체제로 인한 전문성 부재 △정경유착에 따른 경쟁력 상실 때문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동남아 국가는 외국어나 기술, 경영 능력을 갖춘 엘리트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 여건이 부족하다.
말레이시아 항공사인 에어아시아의 토니 페르난데스 사장은 “한국의 성공은 정부 차원에서 연구개발(R&D)과 인재 양성에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라며 동남아 지역에도 이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같은 국가인데도 각 부족이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유지해 통합이 어려운 점도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인재 활용 범위도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는 2억3000만 명의 주민이 1만7000여 개의 섬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언어도 다른 지역이 많다. 브라질이 광활한 국토에도 불구하고 단일 언어를 사용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남아에 만연한 족벌정치와 마찬가지로 경제계에서도 족벌경영이 일반화돼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동남아 기업의 수준을 낮추는 요인이다. 정경유착이 심각해 각종 비리와 특혜가 난무하는 것도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 잡지는 이들 국가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역내 교역에만 주력하는 것도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 수준이 ‘동남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세계 시장에서 밀려난다는 설명이다.
방콕=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