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물건이 안 팔릴 때 ‘세일’을 한다. 그런데 건설업계는 팔지 못한 물건(아파트)이 30조 원어치나 쌓였는데 왜 세일을 하지 않을까.
가격, 생산량, 생산기간 등 상품의 특성 때문이다. 한 해 500원짜리 볼펜 수십만 개를 만드는 제조업체와 5억 원짜리 500채를 짓는 건설업체를 비교해보자.
볼펜은 재고가 쌓일 때 반값에 팔아버리고 몇 달 후 신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 반면 고가 상품을 소량 생산하는 아파트는 한 개 단지를 공급하는 데 4, 5년씩 걸린다. 싸게 팔아치우고 신제품으로 만회하기 쉽지 않다.
분양가의 비탄력성도 아파트 세일을 어렵게 만든다. 분양가는 최초 분양 때부터 입주 때까지 거의 고정된다. 5억 원짜리 500채 가운데 안 팔린 100채를 4억 원에 팔면 난리가 난다. 이미 팔린 400채의 계약자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깎아주지 않으면 중도금, 잔금을 받아내기 힘들다. 반면 볼펜은 일시적인 재고떨이를 해도 그럴 걱정이 거의 없다.
또 볼펜은 원가 이하에 팔아도 사재기하는 사람이 없다. 큰 위험 없이 자금 융통이 가능한 것이다. 반면 중요한 투자 대상인 아파트엔 투기적 수요가 몰릴 수 있다. 1개 단지, 500채의 가격을 20%만 깎아줘도 수입이 500억 원 감소한다. 중견 건설업체가 감당하기 힘든 위험이다.
업체의 ‘버티기’도 세일을 막는다. 분양 후 입주 때까지 3년 정도 기간이 있으므로 가능하면 버티겠다는 업체가 많다. 실제 입주 후 대량 미분양은 드물었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에게 모험상품이다. 기존 아파트에 비해 시장 상황이 바뀌어도 가격이 변하지 않는 신규분양 시장에서는 모험성이 더 커진다. 분양가가 유연해지면 이 같은 위험이 줄어들 것이다.
방법은 있다. 집값이 안정돼 투기 대상에서 벗어나고, 주택금융이 활성화돼 후분양이 정착되면 일시적 세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 여건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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