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표 바꿔 붙이는 게 제일 큰일이에요.”
19일 오후 서울 중구 남창동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일명 ‘도깨비수입상가’. 이곳에서 30년째 일본 수입 잡화를 팔고 있는 이해동(76) 씨는 원-엔 환율의 급등(원화가치는 하락)에 맞춰 상품에 가격표를 바꿔 붙이고 있었다.
조금 뒤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이 씨의 가게에 들렀다. “왜 이렇게 가격이 올랐느냐”는 손님의 질문에 이 씨는 “환율이 올라서 그렇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은 물건을 둘러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같은 시장 안의 한 와인가게에서 파는 와인 값도 최근 가파르게 올랐다. 프랑스산 샤토 탈보(2002년산) 1병이 9만2000원. 3개월 전에 6만8000원에 팔리던 와인이다. 이 가게의 매니저 안성대(52) 씨는 “오래전 사 둔 와인은 원래 값을 받지만 최근 사들인 와인은 어쩔 수 없다”면서 “값이 올라 손님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원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중산층이 선호하는 수입상품의 소비자가격이 오르고 있다. 특히 원화는 유로, 엔화 등 다른 주요국 화폐들과 달리 달러화에 대해 ‘나홀로 약세’ 상태.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 수입되는 상품들의 가격은 미국산에 비해 훨씬 가파르게 올랐다. 예를 들어 원-유로 환율은 1월 2일 1371.65원에서 20일 1578.49원으로 올랐다. 1월 2일 100엔당 838.20원이었던 원-엔 환율은 20일 1018.15원으로 폭등했다. 고(高)유가에 따른 운송료 부담 증가, 국제적인 원재료 가격 상승도 수입상품의 값을 끌어올리는 데 가세한다.
주요 와인 수입업체들은 2∼3월 와인 값을 평균 15% 인상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되는 일부 고급 와인은 30∼50%나 올랐다. 와인 유통업체인 와인나라 이철형 사장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와인 수요가 폭증하면서 공급이 부족한 것도 가격 상승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산 치즈 가격도 많이 올랐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유럽산 치즈 값은 최근 2개월 사이 8∼10% 상승했다. 호주산 쇠고기 값도 3개월 만에 11% 뛰었다.
부산 국제시장의 수입 식료품 값은 최근 평균 15% 올랐다. 2개월 전과 비교해 미국산 케첩은 20%, 호두는 25% 올랐다. 일본 라면은 28.6% 된장은 20%, 깨소스는 16.7% 올랐다. 심지어 중국산 깨도 10% 올랐다.
정식 수입사가 수입한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쌌던 일본제 디지털 카메라의 ‘병행 수입품’(공식 수업업체 외의 일반 수입업자가 다양한 경로로 수입한 제품) 인기도 낮아졌다.
○ 화폐가치 오른 지역 해외여행 취소 늘어
정종한(58) 씨는 지난해부터 부인과의 유럽 여행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최근 1유로가 1600원 안팎으로 오르면서 생각을 접었다. 정 씨는 “유럽 여행에 필요한 돈이 예산했던 것보다 너무 높아졌다”며 아쉬워했다.
정 씨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대형 여행업체인 모두투어는 1% 미만이던 여행예약 취소율이 최근 5∼10%로 늘었다.
이 회사는 다음 달 1일부터 일본, 유럽 여행 상품가격을 5만∼25만 원 올릴 계획이다. 상품 설계 당시보다 엔화는 100원, 유로화는 200원 정도 올랐기 때문이다.
11개월 된 아이를 위해 일본산 기저귀를 쓰던 정효진(32) 씨는 최근 국산 기저귀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일본산 기저귀 가격이 최근 들어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소비지출 기대지수 가운데 외식 오락 문화 등 이른바 ‘가치지향적 소비’에 대한 기대지수는 1월의 94.3에서 91.2로 3.1포인트 내렸다. 숙명여대 경제학부 윤원배 교수는 “수입 기호품은 필수품이 아니어서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곧바로 줄어든다”면서 “지금 같은 환율 상황에서 중산층의 생활수준은 떨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